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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였나, 하여튼 여름방학이었다. 밤은 깊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잘 수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납량특집 영화 <여곡성>이 이제 막 끝난 터였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가 원혼이 되어 한 집안을 몰락시키는 이야기였다.

언니와 동생도 함께 보기 시작했지만 중간에 무섭다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영화가 끝났을 땐 나 혼자만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피눈물을 흘리던 귀신의 하얀 얼굴이 자꾸 눈앞에 튀어나왔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이니 당시 내가 받은 충격이야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자그마치 30년 동안,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공포영화를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해마다 여름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 공포영화가 개봉한다. 공포에 정신을 빼앗겨 잠시 더위를 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공포를 느낄 때 실제로 몸이 추워진다는 속설이 있다. 이 속설은 얼마나 맞을까?

2년 전 한 언론사에서 이와 관련한 실험을 했다. 공포영화를 보는 동안 10분마다 피부 온도를 측정한 것이다. 영화 상영 20분 뒤 흉부 온도는 1.3도, 손바닥 온도는 1.7도 낮아져 실제 피부온도가 내려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이유는 공포를 느낄 때 우리 몸의 자율신경계가 반응하기 때문이다. 자율신경계는 체온과 호르몬, 심장박동, 소화액 분비 등 우리 몸을 '알아서 챙기는' 시스템이다. 공포를 느끼면 자율신경계는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고 근육과 혈관을 수축시킨다. 또 혈액을 바깥 피부보다는 좀 더 안쪽, 근육과 가까운 혈관으로 보낸다. 피부 바깥쪽으로 따뜻한 피가 잘 돌지 않으니 피부 온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공포라는 감정에 우리 몸이 크게 반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공포는 위험한 상황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다. 119를 부를 새도 없이 긴박한 상황이라면 믿을 건 빠른 판단력과 민첩하고 힘 센 팔다리 밖에 없다. 근육을 비롯한 온 몸을 긴장 상태로 만들고 주요 부위에 에너지 소비를 집중해 언제 터질지 모를 위기상황과 공격에 순간적으로 대응하려는 몸의 노력이다.

공포를 느끼는 정도와 대상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고소공포증이나 무대공포증처럼 많은 이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공포가 있는 반면 오프라 윈프리가 앓고 있다는 풍선공포증(풍선이 터질까 두려워 풍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모서리공포증처럼 특이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상업적인 목적의 공포영화는 가능한 한 많은 관람객을 모으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가장 보편적인 공포 요소들로 영화를 구성한다.

무엇이 공포영화를 무섭게 만드는가

 2년 전 한 언론사에서 이와 관련한 실험을 했다. 공포영화를 보는 동안 10분마다 피부 온도를 측정한 것이다. 영화 상영 20분 뒤 흉부 온도는 1.3도, 손바닥 온도는 1.7도 낮아져 실제 피부온도가 내려갔음을 알 수 있었다.
 2년 전 한 언론사에서 이와 관련한 실험을 했다. 공포영화를 보는 동안 10분마다 피부 온도를 측정한 것이다. 영화 상영 20분 뒤 흉부 온도는 1.3도, 손바닥 온도는 1.7도 낮아져 실제 피부온도가 내려갔음을 알 수 있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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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킹스대 수학과 연구팀은 '무엇이 공포영화를 무섭게 만드는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이를 수치화하는 공식을 만들었다. 이른바 '공포공식'이다. 공포공식의 변수는 긴장감, 사실성, 환경, 피, 진부한 장면, 이렇게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긴장감'을 유발하는 요소로는 음향, 미지의 사람, 추격, 함정, 충격적인 장면이 있다.

특히 음향과 공포영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공포영화를 무음으로 보면 긴장감과 공포감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가 너무 무서워 심장이 터질 것 같다면 눈만 감기보다 귀도 함께 막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크다.

다음으로 '사실성'은 현실과 상상이 적절히 어우러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논리와 상식으로만 이야기를 풀어 가면 지루하고, 그렇다고 물불 안 가리고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도 이해도가 떨어져 공포감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 번째 '환경' 변수에는 혼자가 된 주인공, 어둠, 촬영장소가 한 몫 한다. 이때 등장인물 수가 적을수록 공포감은 커진다. 어두운 밤, 낯선 골목에서 여럿이 있다가 갑자기 혼자 남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네 번째 '피'는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다. 하지만 너무 자주, 많이 나오면 관객들은 금세 피곤해진다. 마지막으로 '진부한 장면'은 관객이 생각한 대로 영화가 전개되는 것이다. 식상하고 뻔한 장면에 공포감이 생기기는커녕 하품만 나온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연구라기보다는 재미 위주로 만든 공식이긴 하지만 꽤 공감이 간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여곡성>은 이 모든 것이 적절히 어우러진, 잘 만든 공포영화였다. 사실 난 단막극 <전설의 고향>만 보고도 꺅꺅 비명을 질러댈 만큼 겁이 많았다. 공포영화가 뭔지도 모르던 내가 프로그램 광고에 홀려 그만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한참 동안 마당 한구석에 있던 화장실도, 장독들이 늘어서 있던 뒷마당에도 혼자 가지 못했다. 어디선가 하얀 손이 쑥 올라올 것 같았다. 방광염과 변비에 걸리지 않은 건 천만 다행이다.

나이가 들면서 내로라하는 주옥같은 공포영화들이 무수히 극장에 개봉했지만 나는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다. <링>, <주온>, <여고괴담>, <장화홍련>은 모두 내 인생엔 없는 영화다. 아, 제목에 낚여 실수로 한 편 보긴 했다. 일본영화 <기묘한 이야기>는 <여곡성>과는 또 다른 공포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실 아직도 <기묘한 이야기>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기상관측 이래 111년만의 더위라고 한다. 정말 징글징글하게 덥다. 30년 만에 공포영화의 힘을 빌려 잠시 더위를 잊어볼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공포를 마주하긴 여전히 두려운 쫄보. 그냥 <여곡성>이나 <기묘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볼까. 추억의 영화이니 괜찮을 거란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이번 여름도 이래저래 밤잠은 다 잤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공포영화#과학에세이#여곡성#기묘한이야기#공포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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