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제주도 생수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10대가 사고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월 전북 전주에서는 한 통신회사 관계사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했던 10대가 목숨을 끊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특성화고 학생이라는 것이다.
9일 이은아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아래 특성화고노조) 위원장은 이들의 잇따른 죽음을 "특성화고 학생들이 안전하지 않은 노동현장에 투입돼, 고강도 업무를 해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이상하게 병가가 많더라. 알고 보니 대졸 사원에게는 특수하게 제작된 보호장비를 주는 반면 특성화고 졸업생에게는 선임이 쓰던, 겉만 멀쩡한 보호장비를 주더라. 그런 장비를 쓴 채 독한 화학약품에 노출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병 들어간다."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은 이날 오후 4시 서울 중구 청년일자리센터에서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권인 증진 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 고용노동청 등이 특성화고 학생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정책적인 고민을 나누자고 만든 자리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나란히 앉아 특성화고 학생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특성화고 졸업생들은 '고졸이라 받는 차별'의 고통을 토로했다. 이은아 위원장은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57%가 졸업 후 사무직·생산직·서비스직·디자인직 등 다양한 업종으로 나간다"라면서도 "그런데 임금체불·최저임금 미달·장시간 노동·차별과 무시라는 공통적인 문제를 토로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특성화고 졸업생을 고졸사원, 저학력 사원, 초급 기술자로 보는 인식에서 비롯된 문제다"라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특성화고 졸업생들은 각자 전공을 가지고 사회에 진출하지만 사회는 그 전공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일례로 펀드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펀드투자 상담사 자격증을 따야 한다"라며 "하지만 고졸은 권유대행 자격에만 응시할 수 있고 상품판매 자격은 대졸이거나 은행에 취업해야만 가능하다"라고 했다.
고졸이라 임금 차별도 받고 있다고 했다. 이 위원장은 "특성화고 졸업생이 하루 9시간씩 주 6일 일해 월 140만 원을 받았다"라며 "같은 일을 하루 8시간씩 주 5일 한 대학교 재학 중인 알바생도 같은 월급을 받았다"라고 했다.
특성화고 졸업생인 조지연(25)씨는 "승진 차별이 있다"라며 "대졸은 3단계에서 시작해서 올라가는데 특성화고는 1단계부터 시작해서 3단계까지밖에 못 간다"라고 했다. 그는 "승진을 못 하면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결국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일하며 대학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고 했다. 학력 위주 사회가 만든 '고졸 차별'이 기술전문가들인 특성화고 졸업생들을 대학으로 등 떠밀고 있는 것이다.
취업관리지원센터, 노무사 신설 등 요구 쏟아져특성화고 졸업생들은 노동현장에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환경 전수조사·특별근로관리감독·특성화고 졸업생을 위한 '취업관리지원센터' 설치 등을 요구했다. 박원순순 시장은 "서울노동권익센터 산하에 특성화고 졸업생들을 위한 지원센터를 만들면 좋겠다"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희연 교육감도 "진로직업센터에 기능을 추가하거나 서울시와 협력해 취업관리지원을 하겠다"라고 했다. 그는 "마을노무사(9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을 대상으로 무료 노무컨설팅을 지원하는 제도)라는 제도가 있다"라며 "특성화고 학교노무사를 신설하는 것은 어떠냐"라고 박 시장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새로운 정책 제안뿐 아니라 시와 교육청 차원에서 진행 중인 '특성화고 노동권익개선사업'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은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의 노동인권 보호의 일환으로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서울지역 특성화고·마이스터고·산업정보학교 등 80개 학교 3학년들을 대상으로 '2018 특성화고등학교 노동인권교육'을 진행했다.
공인노무사 등 노동인권 전문강사가 학교로 찾아가 현장실습생들이 알아야 할 기초노동법 등의 교육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환경이 열악해 교육을 듣는 학생들도 하는 교사들도 불만이 많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홍소영 서울노동권익센터 교육홍보팀장은 "노동인권교육에서 교육 당사자들이 가장 크게 불만을 제기한 건 교육 환경이었다"라며 "학교 기자재는 낡아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옆 학교가 시험기간이라는 이유로 항의를 하면 마이크나 영상의 볼륨을 줄여야 한다"라고 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도 "한 특성화고에 노동교육을 갔었는데, 매우 추운 강당에서 고장 난 기자재로 800명 앞에서 50분간 수업을 했다"라고 말했다.
특성화고 졸업생 조지현씨는 "몇백 명이 한꺼번에 교육을 듣다 보니 집중해서 열심히 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라며 "필수적으로 이수할 수 있도록 교과과정에 노동인권교육을 넣어야 할 것 같다"라고 제안했다.
서울시, '특성화고 졸업생을 위한 사회적 보호망 구축' 나서토론회에 앞서 지난 8일 서울시는 서울시교육청과 고용노동청과 함께 '특성화고 졸업생을 위한 사회적 보호망 구축'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서울시는 이날 토론회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현재 수립 중인 계획을 보다 구체화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시가 수립 중인 대책은 질 좋은 일자리 만들기를 위한 근로환경 개선과 부당 노동행위에 대한 원스톱 권리구제다. 서울시가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특성화고 졸업생 근로사업장 리스트를 확보해 해당 사업장을 대상으로 노동법 상식, 안전지식 교육을 실시하고 부당 노동행위가 적발된 사업장에는 서울시 마을노무사를 통해 무료 노무 컨설팅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행점검을 통해 개선되지 않은 사업장에는 고용노동청을 통해 추가 근로감독이 이뤄지게 된다.
특성화고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부당 노동행위에 대한 상담부터 권리구제까지 원스톱 지원을 제공하고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과 협력해 직종‧고용형태별 주요 노동법 지식, 활동가 양성, 권리구제 방안 등에 대한 교육도 병행한다.
원스톱 지원은 서울시 노동권익센터가 전담한다. 특성화고 졸업생 전담 상담사를 따로 배치하고 상담창구도 전화, 방문, 카카오톡 등으로 다양화해 접근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부당 노동행위의 정도, 상담자의 의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단순상담부터 법적구제까지 단계별로 지원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