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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6일 사임한 김성곤 전 국회 사무총장은 한때 의정활동을 함께했던 고(故) 노회찬 전 정의당 원내대표에 대해 "정치를 하던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서 반성을 많이 하였다. 죽음을 선택한 한 진보 정치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울림이 매우 컸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진보 정치인들이 도덕성을 주장하는 반면에 이번 사건이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것처럼 되었기 때문에 진보정치의 이중성, 위선에 대한 지탄의 소리를 염려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일반 국민들이 노 의원을 지지하는 목소리와 함께 의로운 정치인을 향한 국민들의 평가가 언론에서 평가한 것보다 훨씬 무게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4선 국회의원(15, 17, 18, 19대) 출신으로 국회 국방위원장, 국립청소년수련원 초대원장,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오랜 의정활동 속에서 상생의 정치, 종교평화를 위한 노력 등으로 그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저서로는 <도의 정치>, <평화> 등이 있다. 인터뷰를 위해 강남구 학동에 있는 사단법인 평화 대표 사무실에서 지난 6일 만났다. 다음은 김 전 국회 사무총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김성곤 전 국회사무총장.
김성곤 전 국회사무총장. ⓒ 김성곤 제공

- 정치가 힘 없는 사람들을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세상 변화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운데.
"이번 노 의원 죽음에 대한 애도와도 비슷한 현상이다. 지난번 20대 총선에서 정의당 전국 득표수가 10%선에 근접하는 적지 않은 지지도를 보였으나 실제 국회의원은 6명밖에 안된 것은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모순 때문이다. 지금의 소선거제도에서 연동형비례대표제, 최소한 중선거구제로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변화하고 이에 따른 관련 정책도 마련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다수당이 아니면 지금의 선거제도를 못 바꾼다. 강자의 논리만 계속 국회에서 통하고 있다. 양심적인 태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다수당 내지는 강자위주로 가는 정치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국회의원 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
"국회 들어오기 전에 종교평화운동을 했다. 모든 종교는 종파를 떠나서 진리를 향한 도반이며 서로 형제처럼 지내야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서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류역사상 전쟁을 하거나 사회적 갈등을 겪는 것은 성자들의 깊은 뜻을 모르는 행위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들은 한 형제라는 의미의 종교평화운동을 시작하였다."

- 국회의원 시절에 상생정치를 위한 노력이 각별했다는데.
"1994년 대학에 종교학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사무총장을 할 때 민주당 소개로 국회의원 출마하게 됐다. 국회에 들어 와보니 서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보수와 진보, 좌우, 마치 종교계가 전쟁하는 것 못지않게 국회에서 매년 격한 몸싸움이었다.

종교가 진리를 향한 같은 도반이듯이 정당도 이 모든 것이 국민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합리적으로 대화해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상생의 정치를 위해 노력해 왔다. 국회 내에 '평화를 위한 국회종교의원모임', '국회 일치를 위한 정치 포럼'를 통해 적어도 신앙을 가진 여야 국회의원만이라도 싸우지 말고 상생의 정치를 하자고 하였다."

- 반응은 어땠나?
"우리나라 정치판이라는 것이 이론적으로 좋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쉽지가 않은 것이 현실이다."

- 국회의원 시절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있다면 언제였나.
"1998년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이 지금의 여수 갑, 여수 을로 행정구역이 통합 되는 과정에서 내 지역구였던 여천시, 여천군 유권자와 기초의원을 설득하는데 몹시 힘들었다. 힘은 들었지만 통합 덕택으로 여수시 세계박람회가 유치되었고 여수시 발전에 기여한 바도 있었다. 이 일로 여수시를 통합은 시켰지만 내 지역구가 없어지는 상황에서 결국 16대 국회의원 출마를 자진 포기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지역구 유권자들이 그토록 통합을 반대하던 것을 무리하게 강행하기가 쉽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 재미교포 로버트 김이 스파이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그 당시 동생 입장에서 마음고생이 많았을 텐데 소회가 있다면? 
"사실 형의 일로 국회에서 재외동포위원회 위원장을 8년간 맡으면서 재외동포법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형은 1996년 당시 미해군 정보국요원이고 미국시민권자이면서 미국 공무원이기 때문에 미국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미국이 우방인데 그런 정보는 줘도 되는 것이 아니냐'였지만 결국 미국법정에서 간첩음모죄로 처음에는 무기징역형 이었다가 나중에 12년형으로 감형되어 복역까지 하게 되었다.

미국법 입장에서 실정법 위반이라는 어쩔 수 없는 사건이었고 한국에서는 '정부를 위해 희생한 애국자인데 왜 정부가 나서지 않느냐'는 주장이 있었지만 형이 미국 시민권자이기에 나설 수가 없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국민들이 구명운동을 위해 국민성금을 내 주었다. 이를 계기로 형의 뜻을 살리기 위해 1999년 '사단법인 평화'를 설립하여  '평화포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등 인류 평화운동을 목적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 로버트 김의 현재 근황이 궁금하다.
"현재 79세이며 한인들이 많이 사는 미국 버지니아주 자택에서 소일하고 있다. 2년 전에 한국에서 <로버트 김의 편지> 출판기념회를 갖기도 하였다."

- 20대 총선에서 호남 불출마를 하게 된 계기는?
"소위 호남, 영남을 텃밭이라 하는데 이런 곳에서 오래 하게 되면 당내에서 다선 의원들에게 용태 요구가 있게 돼 부담이 됐다. 또한 2012년 당시 여수지역구 선거 공약이 여수세계박람회 사후활용 문제이었는데 2016년 되도록 여수세계박람회 사후활용 방안이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어 그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에서 불출마하게 됐다. 이로 인해 여수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고 서울에서 가장 보수적인 강남 지역구를 자진해서 맡고 있다."

- 의정 생활에서 소속 당의 입장과 평소 소신이 달라 서로 부딪히는 경우가 있었을 텐데.
"그런 일들이 많았다. 정치에는 소의와 대의가 항상 부딪치는데 지역구 일은 소의이고 나라일은 대의이며 인류의 일은 이보다 더 큰 대의라고 생각한다. 소의와 대의가 충돌할 때는 대의를 선택하는 것이 소의도 살고 대의도 사는 길이다. 정치가 사는 길이 된다. 그러나 정치를 하다보면 대를 버리고 소를 택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할 때가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齐家治国平天下)' 글귀처럼 자기 수신을 잘하면 작은 이익보다는 큰 이익을 위해서 결단을 내리게 되고 큰 이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면 자기도 살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도 살고 그러다보면 평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동안 상생정치와 평화운동을 하게 된 것도 이런 정신 바탕 위에서다."

- 향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미국 뉴욕에 유엔본부가 있는 것처럼 모든 종교인들이 세계 평화를 위해서 상호 협력하는 국제기구를 결성하는 일이다. 기존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는 종교가 서로 다름에도 서로 협력하자는 취지의 기구이지만 내가 구상하는 국제기구는 모든 종교인은 한 형제라는 의미의 대승적 차원의 평화국제기구를 말한다."


#종교평화#상생정치#여수세계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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