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전국의 사진가들이 모여드는 곳이 있다. 아니, 전국의 사진가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라고 해야 정확한 말일 것이다. 찜통 같은 무더위에도 매년 사진가들을 유혹하는 건 다름 아닌 꽃이다.
화려한 봄꽃도 향기 진한 가을꽃도 아닌 여름꽃, 백 일 동안 붉게 핀다는 백일홍이 그 주인공이다. 배롱나무로도 불리는 이 꽃들이 활짝 피면 이곳은 선경이 된다. 오래된 배롱나무가 뿜어내는 은은하고 찬연한 색의 잔치, 땅도 물도 하늘도 온통 붉은 꽃의 축제가 벌어지는 곳.
별천지 가는 길명옥헌. 소쇄원 가는 갈림길에서 한갓진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후산 마을이 나타난다. 한때 이곳은 비장의 답사처로 알음알음 알려진 곳이었다. 지척에 있는 소쇄원과는 다른 헛헛한 풍경이 아름다운 원림으로 입소문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옥헌 원림은 마을 뒤쪽 산자락에 있다. 마을 초입의 수백 년 묵은 팽나무와 연못의 아름드리 왕버들은 후산 마을의 오랜 내력을 말해준다. 구불구불한 마을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이 앞을 막는다. 그도 잠시, 언덕을 넘는 순간 갑자기 밝은 빛이 터지며 연못과 어우러진 탁 트인 공간이 느닷없이 펼쳐진다.
연못 주위엔 소나무들이 장대하게 솟아 있고 붉게 물든 배롱나무들이 연못가를 빙 둘러싸고 있다. 그 너머로 멀찍이 정자 하나가 숨은 듯 지붕선만 살짝 내밀고 있다. 이 풍경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어서 방금 마을을 지나왔는데도 어느새 마을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만다.
명옥헌을 찾는 이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정자를 향해 걷는다. 연못 둘레로 난 길이 자연스레 정자로 이어지는 데다 정자가 이정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겨우 몇 발자국 뗐을 뿐인데 길은 점점 깊어지고 세상은 저만치 멀어진다. 이곳이 세상과 유리된 별천지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정자에 올라 내려다봐도 연못과 숲에 가린 별세상이다.
정자는 뒤쪽으로 올라 사방을 관망할 수 있다. 비탈진 경사에 높다랗게 달린 마루는 오로지 원림(정원) 감상을 위한 공간으로만 보인다. 앞뒤로 트인 방문이 앵글이 되어 원림 풍경이 들어오고 마루에 서면 사방으로 별천지가 펼쳐지고 소나무 사이로 무등산까지 아득히 들어온다. 정자에선 무수한 꽃들의 향연을 보며 암반을 타고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도 들을 수 있다.
대개 이쯤에서 휴식을 끝낸 이들은 무더기로 피어난 붉은 백일홍이 아쉬운 듯 마지막으로 눈길을 건네고 반대편 연못 길로 돌아나간다. 문득 명옥헌이라는 이름이 궁금해지는 이들이 있다.
눈썰미가 있는 이라면 정자 뒤쪽 배롱나무 사이로 연못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알아챈다. 아래 큰 연못과는 달리 이 작은 연못은 고요하고 그윽하다. 그러고 보니 소쇄원에서도, 임대정에서도, 부용동 원림에서도 위아래로 연못이 둘이었다.
대개 상지(上池)는 동적이고 하지(下池)는 정적인데 비해, 이곳은 되레 위쪽 연못이 조용히 완상하기에 좋고 아래 연못은 꽃 잔치에 들썩인다. 상지에는 네모난 연못에 바위가 놓여 있어 수중암도(水中巖島)이고, 하지에는 둥근 섬에 배롱나무가 있어 방지원도(方池圓島)이다.
이 두 연못의 물은 어디서 흘러왔을까, 발걸음을 좀 더 깊이 옮긴다. 이제야 물의 근원에 가까이 왔음을 직감한다. 암반을 타고 졸졸졸 흘러내리며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를 내는 물줄기가 거기에 있다.
계류를 따라 조금 깊숙이 들어가니 '명옥헌 계축(鳴玉軒癸丑)'이라고 적힌 바위 글씨가 보인다.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라는데 그의 글씨가 맞다면 계축은 1673년이다. 정자에서도 구슬이 구르듯 낭랑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어 명옥헌이라 했을 것이다.
왕이 찾은 인물을 위해 지은 원림정자로 다시 내려오면 아까 보지 못했던 앙증맞은 굴뚝과 맵시 있는 정자 건물이 보인다. 그러다 삼고(三顧)라는 현판에 눈길이 머문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세 번 찾은 삼고초려를 연상하는 이 글자는 인조와 얽혀 있다.
후산 마을에는 인조대왕이 말을 맨 은행나무라는 뜻의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이라 불리는 은행나무가 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능양군 시절에 호남 지방을 두루 다니며 세력을 모으던 중, 이 마을에 살던 오희도를 찾아 왔을 때 타고 온 말을 대어 둔 곳이라고 한다. 삼고 또한 같은 사연이다.
원래 후산 마을에는 600여 년 전 순천 박씨가 들어와 살았다. 명옥헌은 조선 중기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 1583~1623)가 어머니 박씨를 따라 외가가 있는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그는 광해군 시절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조촐한 서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 그러다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기주관이 되었으나 1년도 안 되어 천연두에 걸려 41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1652년에 오희도의 넷째 아들인 장계(藏溪)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아버지가 살던 터에 명옥헌을 짓고 아래위 두 연못을 파고 주위에 배롱나무를 심어 원림을 꾸몄다고 한다.
송강 정철의 아들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 1582~1650) 이 쓴 <명옥헌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정자에는 오이정의 호인 장계정(藏溪亭)이란 현판도 걸려 있고,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의 이름을 따서 도장정(道藏亭)이라고도 했다.
원래 백일홍 숲은 없었다흔히 무릉도원 하면 복숭아나무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배롱나무도 깊은 관련이 있다. 배롱나무의 본디 이름은 자미목(紫薇木)이다. 자미는 도교 선계의 하나인 자미탄(紫薇灘)을 말한다.
명옥헌 인근에도 자미탄이 있었다. 바로 식영정과 환벽당 사이를 흐르던 여울을 자미탄이라 했다. 송강 정철은 <자미탄>이라는 시에서 봄이 지나도 꽃이 백 일이나 피니 봄의 신이 시기할 정도라며 백일홍을 예찬했고, 고경명은 같은 제목의 시에서 백일홍을 타고난 자태가 원래 부귀하고 노을빛 가득한 꽃이라고 읊었다.
백 일 동안 꽃을 피우는 자미목이 울창한 명옥헌은 그야말로 선계요 무릉도원이었다. 근데 명옥헌을 조성할 당시에도 그랬을까. 오이정이 원림을 조성했던 17세기 중반에는 지금과 같은 무성한 백일홍 숲은 없었던 것 같다.
<명옥헌기>나 당시의 시를 보면 백일홍이 나오지 않는 데다 당시에는 연못을 관상하기 위해 나무를 듬성듬성 심는 조성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명옥헌의 주인공이 정자와 연못, 몇 그루의 나무들이었지 지금처럼 백일홍 숲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옥헌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가 150년 남짓 되었고, 20그루 정도가 백 살을 넘겼고, 나머지는 담양군에서 나중에 심은 불과 수년에서 수십 년 된 나무라는 것으로 증명된다. 오이정이 명옥헌을 처음 조성할 때 심었다는 나무는 지금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이 사는 마을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홀연 다른 세상을 연출하는 명옥헌은 분명 별세계이다. 돌아보면 인간세계의 이웃처럼 친근하고, 편안하고, 느긋하다. 게다가 산자락과 언덕이 포근하게 주위를 감싸 안아 담장이 없는데도 아늑하다.
산기슭과 계류의 선을 따라 원림을 자연스레 조성하여 살짝 드러난 석축을 보지 못한다면 인공적인 요소도 찾기 어렵다. 더군다나 정자 앞 모서리 연못가에 그대로 노출된 자연 암반은 갖은 모양의 괴석처럼 보여 풍경은 더욱 기묘해진다.
명옥헌에선 우리의 오감을 모두 깨울 수 있다. 처음 원림에 들어섰을 때 확연히 드러나는 시각적인 풍경, 화려한 꽃들의 감각적인 풍경, 시를 읊으며 가만히 거니는 시적 풍경, 정자에 올라서서 감상하는 풍경, 계곡 물소리의 청각적인 풍경, 연못에 비친 그림자 풍경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새벽에 명옥헌을 찾는다면 깊은 침묵의 풍경에 세상일은 금세 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