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나오키 문학상'나는 본디 게으른 데다 요령을 피우는 독자라서 소설을 읽을 때 일단 '문학상' 수상작부터 찾아보는 편이다.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해당 소설이 훌륭하다고 맹신하지는 않지만, 망망대해 같은 소설들 속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을 심사위원들이 어련히 알아서 골랐거니 하고 믿어주고 싶은 탓이다. 쉽게 말해 권위에 호소하여 책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고르려는 심산이다.
그러나 가끔 어떤 문학상은 심사위원들이 나태해질 때가 있다. 아무리 선해(善解), 즉 좋게 봐주려 해도 '어찌 이딴 소설이 문학상까지 받는 거지?'라는 의심이 드는 작품들을 줄곧 선정하는 식이다. 다행히 그러한 파행이 한두 해로 그치고 이내 정상화된다면 다행이지만, 삼년 이상 계속될 경우 난 대개 그 문학상과 연을 끊는다. 말하자면 베이컨이 말한 '우상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는 내 나름의 경계심이랄까, 방식이랄까.
그동안 이러한 과정으로 제법 여러 문학상들과 결별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속칭 '믿고 보는' 문학상들이 몇 있다. 그중 하나가 일본에서 매해 1월과 7월에 수상작을 선정하는 '나오키 상'이다. 일본에서는 가장 권위 있고 공신력 있는 문학상이라 평가받는다.
2016년도 상반기에는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원로 작가의 단편집이 선정되었다. 작가 오기와라 히로시의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다. 각 편마다 인물들이 겪는 사연들은 제각각이지만, 다들 불의의 사연을 겪고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돌덩이를 지니고 산다는 점은 묘하게 동일하다. 그리고 다들 그 같은 마음의 짐을 어떤 식으로든 줄이거나 해체하거나, 소멸시키려고 각자가 부단히 발버둥 친다는 점 역시 묘하게 비슷하다.
중년 부부의 성인식
"여보, 우리 성인식에 나가볼까?" …… "구경하러 가자는 게 아니라, 성인식에 참석하자고." 일단 말을 꺼내놓고 보니 멈춰지지 않았다. 어디서 말이 샘솟는 것처럼. "대리 성인식. 스즈네 대신 당신이 후리소데를 입는 거야."(30~31p)
총 6개의 작품 중에서 읽고 난 뒤 한동안 멍하니 방바닥에 누워있어야 했을 만큼 생각이 아득해지는 단편이 있었다. 이 책의 최전선을 맡은 <성인식>이라는 작품이다. 표제작인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도 심금을 울릴 만큼 빼어났지만, 개인적으로 수작을 꼽자면 <성인식>을 꼽고 싶다.
소설 속 1인칭 화자는 딸을 잃은 아버지다. 그의 유일한 딸은 15세에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한다. 아버지는 그날 자신이 딸에게 등교를 재촉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비극이 없었을 것이라 문득 문득 자책한다. 그와 그의 부인만 남은 가족은 딸이 살아 숨 쉬던 과거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침묵이 늘고 한숨이 잦아졌다. 누구도 먼저 딸의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지만, 삶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딸을 잃은 상실감이 그들의 생각과 말에 배어 있다. 그렇게 그들은 돌덩이처럼 마음에 딸을 이고 꾸역꾸역 살아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기모노 홍보책자가 한 부 배달된다. 이제 곧 따님이 성인식을 치러야 할 테니 기모노를 하나 장만해주시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다. 지금껏 최대한 딸의 얘기를 겉으로 드러내기 꺼렸던 부부에게 이 책자 한권이 변화의 계기가 된다. 그들은 딸을 대신해 성인식에 참석하기로 한다. 딸 대신 성인식을 치름으로써, 그동안 그들이 죄인처럼 갖고 살던 딸에 대한 미련과 죄책감을 후련하게 털어내고 싶어서다. 그래야 비로소 저세상에 있는 딸도 자신들을 맘 편히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부부는 그날부터 '20살 되기 프로젝트'를 감행한다. 그들은 다이어트를 하고, 피부 관리를 받고, 젊은 세대처럼 머리를 바꾼다. 성인식을 준비하며 회춘 삼매경에 빠져있는 동안 그들은 그동안 금기처럼 여겨지던 딸 얘기를 조금씩 자연스럽게 해제한다. 그리고 차츰 우울하지 않고 칙칙하지도 않게 딸에 관한 추억을 즐기는 법도 배운다. "안녕, 잘 가"라는 말 한번 제대로 못한 채 이별해버린 딸. 그들은 딸과 정식으로 헤어지기 위해서 금년도 성인식을 그들 가족만의 이별 행사로 꾸려나간다.
뭉그러지는 마음에 멈춤 선 긋기
"다들 웃지, 우리 보고." 고개 숙인 미에코는 마치 공개처형장에 끌려가는 죄수 같은 걸음걸이다. …… 스즈네의 장례식 때에는 많은 사람이 울어주었다. ……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다들 스즈네를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타인이니까. 잊지 못하는 사람은 나와 미에코뿐이다. 나와 같은 슬픔을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젊게 꾸민 모습이 묘하게 어울리는 여자, 지금 옆에서 걸어가는 마흔다섯 살 난 소녀의 팔을 잡았다. "신경 쓸 거 없어. 타인을 자기를 비추는 거울로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일"(45p)
물리학에서는 시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엔트로피, 즉 무질서함이 증가하는 것.' 인간은 늙고, 물건은 낡게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조금씩 늙고 낡아서 태초의 질서정연한 본래 모습을 잃어가는 과정이 과학이 바라보는 시간의 정체다.(과학 용어로 엄밀히 표현하자면 '열역학 제2법칙'이다.)
하지만 무질서해지는 것은 존재들의 겉모습만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의 정서나 심리도 세상을 살면서 서서히 헤어지고 꿰진다. 어릴 때는 티 하나 없이 맑았던 마음이 어느덧 인간관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쏠리면서 생채기를 갖게 된다. 혹은 소설 <성인식>의 부부처럼 불의의 사건사고로 인해 이제껏 무탈했던 마음의 평화가 별안간 송두리째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흠집이 난 가슴을 마냥 방치하면서 살 수 없다. 몸이 노쇠하고 물건이 고장 나면 조금씩 고쳐 쓰듯이, 가슴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 우리는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뒤 함몰된 부위들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깨져버린 그릇을 다시 붙일 수 없는 것처럼, 상처 나고 허물어진 마음을 완벽히 개·보수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상처 부위가 더는 커지지 않도록, 그리고 허물어진 테두리가 더 넓어지지 않도록, 뭉그러진 마음에 나름 '정지선'을 긋는 일은 가능하다. 중년의 부부가 우스갯거리가 될 것을 빤히 알면서도 딸을 위해 용기를 내서 20대들이 즐비한 성인식에 참석하려고 무리를 한 이유도, 딸의 부재로 뭉그러져버린 그들의 마음에 "이제 그만!"하고 멈춤 선을 긋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시간의 파괴력에 저항하는 세레모니
…… 원래가 많이 닮았던 모녀다. 미에코가 정말 스즈네 같다. …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일 더하기 일은?" 엇, 치즈 아니야, 하는 소리는 무시한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한다. "일 더하기 일은?"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서도 아빠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스즈네는 보나 마나 이렇게 말하겠지, 하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삼."(53~54p)
딸의 부모는 왜 하필 딸과의 이별 행사로 성인식을 택한 것일까. 아마도 사회통념상 으레 자녀가 부모에게서 심정적으로 독립하는 시기가 성인이 될 때 즈음이기 때문에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성인식 이후로 자식은 비로소 자립을 꿈꾸는 인격체가 된다. 부모는 성인식이라는 경계선 너머부터 서서히 자식에 대한 보살핌을 줄여나간다. 부부는 딸의 사춘기 이후 성인이 될 때까지 남은 5년을 충실히 양육하고 돌보지 못했다는 후회나 괴로움을 그 같은 무형의 경계선 너머로 야금야금 희석시키고 싶었던 것이리라.
소설집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는 이렇게 자기 스스로 정신을 치유하고 마음을 달래는 사람들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비록 가공의 인물들이지만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중 누군가도 얼마든지 그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봤거나 놓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가의 픽션은 실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독자는 소설 속의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우리도 삶의 의지가 마모될 때 어떠한 치료법을 쓰는 것이 좋을지 가늠해볼 힘을 얻는다.
물론 시간의 파괴력은 대단하고 인간의 삶은 예측불허라서, 겨우 마음을 추스른 후에 언제 다시 또 다른 사건사고들로 우리들의 멘탈이 누더기가 될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삶에 고비를 맞고 인생의 무참함에 여울질 때마다, '의식'적으로라도 자신의 무질서해지는 멘탈을 정화시키려는 '의식(儀式, ceremony)'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네 인간이 엔트로피라는 냉엄한 물리 법칙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얼룩지고 해진 과거를 새로고침 해주는 '치트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