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근교 에베르스발데에서 태어난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는 1970년 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학교인 뒤셀도르프 아카데미Kunstakademie Düsseldorf에 두 번 입학했다. 처음은 영화과였지만 1976년 독일 내 교육 기관 최초로 사진과가 신설되면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사진과 주임 교수는 베른트 베허Bernd Becher와 힐라 베허Hilla Becher. 일명 베허 부부로 후대에 알려진 이들은 산업화 시대의 공장과 건축물의 현실을 엄격한 격자 구조로 찍으며 명성을 얻었다.
훗날 이들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스트루트Thomas Struth, 토마스 루프Thomas Ruff,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 등의 애제자들은 건조하고 거대한 규모로 찍는 유형학적 접근법을 동시대 사진의 주류로 만들었다. 바로 베허 학파Becher Schule의 탄생이다.
회퍼도 '베허 학파' 1세대의 대표 기수로 불리지만 그가 주목한 대상은 좀 특별했다. 바로 서구 사회가 문화의 이름으로 찬란히 쌓아 올린(혹은 올리는) 공공 건축물의 내부에 매료된 것이다. 당대의 문화적 성취를 대표하면서, 시간이 흘러 역사적 가치를 획득하는 와중에 후대에게는 지식과 경험의 전수 공간이자 영감의 장소, 그들의 삶을 더 풍부하게 하는 공공 장소로 기능하는 도서관, 박물관, 오페라 하우스, 공연장 등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의 건축물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서구 문명을 계속 진보케 하는 현대의 중요한 공공 기관들도 포함된다. 이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정신적으로 '깨닫게'하는 공간을 찾아 회퍼는 전 유럽 대륙을 천천히 거닐어 왔다.
회퍼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성향은 화면 속 공간의 극대화와 인간의 소멸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업들도 모두 광활한 내부 공간과 그에 딸린 여러 부대 시설로 화면을 꽉 채웠다. 뒤셀도르프 시립극장Düsseldorf Schauspielhaus을 시작으로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아르헨티나의 극장과 오페라 하우스를 찍은 작업은 보기만 해도 그 곳에 간 것처럼 즐겁고 황홀한 간접 체험을 선사한다.
중세 수도원 내 바로크 양식의 도서관,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내 복도에 놓인 작은 서가, 로마의 빌라 보르게세Villa Borghese, 에르미타주 미술관Hermitage Museum은 또 어떤가. 장서와 미술품, 벽화와 가구 등의 구성 요소는 온 마음을 빼앗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 곳에 머물다 사라진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끈은 사회적이고 인문적인 의미까지 획득해 기념비적인 장소로 탈바꿈한다.
이 때 인간의 존재를 포착하지 않은 씬은 장소 그 자체에 감각을 집중하는 데 탁월한 도움을 준다. 물론 사람이 싫어서, 다큐멘터리적 공간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 회퍼가 사람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니다. '주인이 없는 초대 자리에서 주인에 대한 이야기가 오히려 많아진다'는 예전 인터뷰 답변을 상기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주목하는 일련의 공간들을 혹시 또 다른 키워드로 엮을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만화적인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본다. 만일 18세기 서구 문명이 한 단계 위로 상승하며 요동치던 계몽주의 시대부터 지금의 현대 사회까지 여러 지적인 사건들의 배후에 어떤 초월적 존재가 신비롭게 관여했다면? 그리고 그 '영혼spirit'이 아직도 서구 사회를 배회하며 여러 공공 공간을 안식처 삼아 현대인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다면?
회퍼는 어쩌면 서구 문명을 인류의 문명으로 격상시킨 '깨우침의 영혼'을 쫓아 그의 안식처를 사진으로 차곡차곡 기록해 온 것은 아닐까. 해당 장소에 이미 설치된 인공 조명과 자연광으로만 작업하는 회퍼는 굉장히 오랜 시간을 투자해 공간에 대해 탐구하고 고심한 후, 이에 대한 정보와 감흥을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엄격한 이미지로 만든다.
앞서 말한 '깨우침의 영혼'이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에서 남긴 흔적을 섬세하게 몸으로 느끼면서 최대한 담담하고 조용하게 인간의 문명과 초월적인 존재의 상호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런지.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에 선보인 특정 작업은 즐거운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세계 최초의 민간 도서관인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사진이다. '지성의 전당'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 곳에는 프랑스 시민들이 끊임 없이 방문한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의 작품 속에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예술가지만 회퍼가 현실의 독재자는 아니지 않던가. 그래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찍은 작업에는 예외적으로 독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화면에 녹아 있다.
여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장소와 섬세하게 호흡하며 그 공간의 분위기와 건축적 요소를 카메라에 오롯이 담던 회퍼가 왜 애초부터 인간 소멸이 불가능한 장소를 촬영 지역으로 선택했을까.
물론 공식적인 답은 정해져 있다. 지성의 공간으로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존재감은 지금 이 시대에도 이견 없이 막대하고, 그런 면에서 장소의 기록이라는 대제 아래 인간의 출연은 현실적으로 용납 가능한 요소다. 하지만 혹시 회퍼는 화면에 출현하는 사람들 가운데 혹시나 '깨우침의 영혼'이 존재하기를 기대하면서, 오늘도 열심히 주변에 영감을 뿌리고 다니는 그가 자신의 작업에 한 번쯤 출연해줬으면 하는 유쾌한 바람을 기원한 것은 아닐런지.
회퍼를 연구하는 학자나, 진지하게 존경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불경에 가까운 말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저런 감동과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칸디다 회퍼의 개인전, <깨우침의 장소들Spaces of Enlightenment>은
다가오는 일요일(8월 26일)에 끝나니 시간을 쪼개서라도 방문하길 바란다.
칸디다 회퍼 개인전 <깨우침의 장소들Spaces of Enlightenment>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54 국제갤러리 2관(K2)
2018년 7월 26일(목) – 8월 26일(일)
입장료 없음 덧붙이는 글 | 필자의 <허프 포스트 코리아> 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 www.huffingtonpost.kr/harry-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