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지하철 에어컨 소리와 각종 소음을 뚫고 들리는 한 목소리. 순간 직감했다. 나타났다. 그가. 그것도 9호선에. 온갖 지하철에서 신고하라고 종용한 터라 맥이 끊긴 줄 알았던 잡상인 아저씨가 오랜만에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오늘 그의 아이템은 바로 색색이 볼펜. 내러티브가 아주 강력한 물건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잉크를 잘 만드는 곳이 어딜까요? 바로 독일입니다. 독일에는 3대 잉크회사가 있죠. 어쩌구, 저쩌구 그리고 바로 이쩌구!"
성대를 압축해 청량하게 울려퍼지는 지적이고 고요한 목소리는 진지한 표정과 만나 판매 논리의 당위성을 높여갔다.
"그 중 이쩌구에서는 볼펜도 나옵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리는 이 4색 볼펜은 우수한 기술로 필기가 끊기지 않고, 그립감이 좋으며, 무엇보다 샤프 펜슬과 지우개까지 구비해 어떠한 상황에서든 요긴합니다."
자, 상품 스펙은 들었고 지하철 매매의 핵심은 여기서 파는 이유와 바로 가격이다. 아니나 다를까, 귀를 기울여보았다.
"같은 제품이 교보문고에서는 2만 9800원. 하지만 세금을 못 내 세관에 압류돼있는 물건을 가지고 와서 지금 이 자리에서는....."
꿀꺽. 과연 저 첨단 밀수품은 얼마인 것인가.
"단 돈 1000원 짜리 두장으로 모십니다."
맙소사. 너무나 싸다. 차라리 만 원이었으면 욕이라도 했을텐데. 5000원에는 3개를 준단다. 브랜드의 헤리티지, 기능의 우수성, 무엇보다 특급 세일을 가능하게 하는 기묘한 상황은 이 예비 호구의 마음을 들끓게 했다. 마지막 아저씨의 히든 펀치!
"자세히 보시면 Swiss, Germany가 쓰여 있어요. 이 두 국가에서 같이 만든 겁니다"
오. 스위스, 독일의 위엄. 역시 미제, 일제는 이제 한물 갔군. 간만에 간결하게 압축된 훌륭한 제품설명을 본 터라 주저하지 않고 돈을 꺼냈다. 연식이 제법 되셨는지 구매를 결정하는 골든 타임에는 친근한 멘트를 날리셨다.
"1년에 5천만 원 버는 볼펜입니다. 가지고만 있어도 돈을 벌어요"
그래, 역시 판매의 끝은 기복신앙이지. 내 손에 들어온 4색 볼펜(+샤프 펜슬 기능까지 합쳐진 대단한 제품)을 찬찬히 뜯어보며 혹여 플라스틱 사출의 허접함을 금새 발견할 수 있을까 들뜬 마음도 잠시. 뭔가 허전했다. 내가 볼펜에 집중하는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잡상인 아저씨는 사라졌다. 그 흔한 '감사합니다' 말도 없이.
급행역과 급행역 사이를 오가는 긴박한 순간에 출현한 그의 존재는 '급행'이라는 첨단 느낌의 대중 교통이 움직이는 바쁜 도시, 서울의 이미지를 묘하게 빼어 닮았다. 안녕이란 말도 없이 사라진 그의 쿨함까지도.
덧붙이는 글 | 필자의 <네이버 포스트>에 올린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