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최근 극장 박스오피스 1~2위를 다투고 있는 영화 '공작'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맞붙었던 1997년 대선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안기부가 국민 몰래 북한정권과 비밀협상을 벌여 휴전선 무력도발을 사주했던, 이른바 '총풍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이 영화의 정서적 꼭짓점은 바로 우여곡절의 고비를 극복하고 김대중 후보가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순간이다.
영화에 삽입된 김대중 후보와 이희호 여사가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장면, 비록 단 한 컷이었지만 영화가 주는 감동을 증폭시켰다. 창밖 골목길을 가득 메운 지지자들을 향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창문을 열고 감격을 표했던 그 집이 자리한 곳은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이다.
마두동 국립암센터에서 후곡마을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밤가시초가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을 하면 정발산 기슭을 따라 펼쳐진 고급 단독주택단지다. 그 한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 일산저택이 자리하고 있다. 대문에 '햇살로 95번길 34-12'라고 적힌 집 주소가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햇살로'라는 도로명이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연이 아니라면, 작명한 이의 마음을 칭찬해주고 싶어진다.
남북의 길목에 작정하고 들어온 일산대통령 당선, 인생의 절정 담긴 공간십자가와 서재, 장롱, 소파 '그대로'"김대중 기념공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햇살로 95번길 34-12, 들어가 볼까요그러나 오늘날 김 대통령 일산 사저는 조금은 쓸쓸히 세월을 견디고 있는 듯 보인다. 1998년 김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돼 청와대로 입성한 후 지금까지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이 비어 있는 집. 기억은 참 연약한 존재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되새기지 않는다면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 빛이 바랜다.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미국에 거주하는 주택 소유자로부터 관리책임을 위임받은 이와 연락이 닿아 굳게 잠겨있던 김대중 일산 사저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마침 8월 18일은 김대중 대통령 서거 9주기를 맞는 날. 역사적 자취를 품은 공간으로 조심스레 들어서는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다.
대문 밖에서 바라본 사저 외형은 주변 주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현대적 구조로 지어졌지만, 대문과 현관 지붕에 한옥 양식의 기와가 올라갔다. 1995년 일산에 집을 짓기로 결심한 김 대통령은 원래 집 전체를 한옥으로 지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지만, 비용과 품이 너무 많이 들어 대문을 비롯해 부분적으로 한옥의 멋을 부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고 한다. 단독단지 두 필지를 연결해, 가운데 마당을 두고 양쪽으로 본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층고도 다소 높아 우뚝하게 솟은 모양새다.
김 대통령이 아낀 배롱나무가 반기는 정원마당으로 들어서니 가지마다 붉고 화사한 꽃망울을 매단 배롱나무가 반긴다. 일명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김대중 대통령이 특별히 아낀 나무로, 국립현충원 김 대통령의 묘소 곁에도 심겨 있다고 한다. 매년 여름 배롱나무는 누군가의 눈길을 기다리듯 꽃망울을 터뜨렸으리라. 마당 대각선 양쪽에는 자태가 우아한 금송 두 그루가 커다랗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김 대통령이 좋아했던 수종이다. 수형이 예쁜 조선 소나무도 몇 그루 서 있고, 사랑채 앞에는 키 큰 모과나무가 성실한 파수꾼처럼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김 대통령을 오랫동안 수행했던 김종선씨는 "꽃과 나무를 무척 좋아하셔서, 일산에서 지낼 당시 고인을 직접 모시고 꽃시장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숱한 사람들과 마주했던 커다란 갈색 소파현관으로 들어서자 거실 한가운데 십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커다란 갈색 소파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거실 안쪽은 주방과 이어진 작은 식당이다. 긴 식탁에는 정갈한 식탁보가 아직도 흐트러짐 없이 놓여있다. 80~90년대를 장식한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김 대통령을 중심으로 거실, 또는 식탁에 둘러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격론을 펼치는 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정치인뿐이겠는가. 다양한 분야에 폭넓은 식견을 지니셨던 것을 고려하면 이 집 거실에 들렀을 이들의 면면은 무척이나 다채로웠으리라.
그 중 대중들의 뇌리에 가장 친근하게 남은 장면은 바로 '이경규가 간다'라는 코너를 진행했던 인기코미디언 이경규씨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의 집을 불쑥 기습했던 장면이다. 그때만 해도 정치인 하면 치열하고 무거운 이미지만 떠올렸던 사람들은 이경규씨를 반갑게 맞이하며 스스럼 없이 농담을 건네는 김대중 대통령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며 찬사를 보냈었다. 일산 사저가 만들어 준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친근한 대통령 후보의 이미지는 그의 당선에도 긍정적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대통령 당선되고 첫 인사를 나눈 2층 창가2층으로 올라가니 김 대통령 부부의 생활공간이 나온다. 전통창호문양 미닫이창을 통해 은은한 채광이 들어오는 안방에는 침대와 나무 장롱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 김 대통령 사저를 구입한 재미사업가가 한국에 들를 때 한동안 묵기도 했다지만, 김 대통령 부부 사진이 담긴 벽시계, 성모상과 가톨릭 십자가 등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저택 안 가구와 소품 대부분은 아마도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남기고 간 것들을 고스란히 보전한 듯 보인다. 잘 알려진대로 김 대통령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창문을 열어보니 대문 밖 마을 골목이 내려다보인다. 김대중 후보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던 1997년 겨울날의 새벽, 창밖으로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던 바로 그 자리다. 당시 정발산 주택단지 골목은 말 그대로 새 역사가 시작됐다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국내외 취재진과 정치인, 그리고 이웃들이 북새통을 이뤘고, 전국에서 몰려온 지지자들이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대통령 김대중"을 연호하기도 했다.
그의 당선과 함께 대통령을 만든 땅 일산과 정발산 등이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당시만해도 일산은 신도시 입주가 막 시작돼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나 문화공간 등이 모양새를 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 자신의 새로운 터전을 잡은 김대중 후보가 앞선 세 번의 낙마를 딛고 보란 듯이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호사가들은 일산이 기가 모이는 풍수라거나, 큰 인물을 만드는 명당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김 대통령의 당선이 아직 공간에 대한 공통기억을 채 만들지 못했던 당시 일산신도시 입주민들에게 커다란 자부심을 선물해줬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수만 권의 책이 도서관처럼 배치됐던 서가다시 사저를 살펴보자. 안방 옆은 서재다. 도서관 문서보관소를 연상시키는 이동식 서가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마당 건너편에 지어진 사랑채에는 아예 방 하나가 커다란 이동식 서가였다.
잘 알려진 대로 김 대통령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애서가였다. 정치인 중 책과 관련한 3개의 타이틀을 홀로 독식했다는 얘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책을 가장 많이 읽고, 가장 많이 쓰고, 가장 많이 보유한 정치인이라는 얘기다. 청와대에 들어갈 때도 3만 권이 넘는 장서를 다 가져가지 못해 별도의 대책을 세워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독서 열정, 그리고 치열한 탐구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서재와 문서창고를 잘 활용해 고인의 높은 정신과 독서의 가치를 함께 전하는 장소로 꾸미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본다.
정발산 사저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대통령은 사저를 짓고 이사 오기 전 강선마을에 아파트를 얻어 1년간 살기도 했다. 일산으로의 이주가 갑작스런 결정이 아니라, 차근차근 계획됐던 것이다. 시간표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김 대통령은 자신을 상징하는 공간인 동교동 생활을 접고 95년 강선마을에 아파트를 얻어 일산의 이웃이 된다. 그리고는 정발산 저택 건축을 시작해 96년 입주를 한다. 이곳에서 97년 대통령에 당선돼 이듬해인 98년 2월 청와대로 들어가며 3년간의 일산 생활을 마무리한다. 이후 사저는 99년 재미사업가 조풍언씨에게 매각되고, 김 대통령은 퇴임 후 재건축된 동교동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 2009년 눈을 감는다.
통일의 시대, 평화의 시대를 설계했던 공간몇 가지 궁금증을 짚어보자. 김 대통령은 왜 낯선 신도시 일산으로 이사를 온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지난 18일 일산문화공원에서 열린 고양김대중평화문화제 행사에 참석한 김홍걸 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김 대통령의 3남)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접경지대로 발전이 더뎠던 일산으로 이사를 하신 까닭은 스스로 북방개척시대를 미리 예견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고양땅은 그에게 민주화 투쟁에 전념했던 정치 인생 전반기와는 결이 다른,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꿈을 보다 원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구상한 땅이 됐다. 92년 14대 대선에서 3번째 고배를 마신 후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아태재단을 설립하고, 보다 준비된 정책과 비전으로 다시 한 번 대선에 도전할 준비를 한 곳. 그리고 마침내 당선의 꿈을 이룬 곳이 바로 고양땅이고 일산이었던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일산으로의 이주는 그의 정치인생 2막을 열어 준 희망과 축복의 땅이 된 셈이다. 민주화를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동교동 시대를 매듭짓고, 민족화해의 초석을 놓은 통일대통령의 시동을 건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퇴임 후 왜 다시 일산으로 돌아오지 않은 걸까.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당선되니 떠나버린 야속한 이웃'이라며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간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건강 때문이었다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 당선 당시 이미 고령이었고, 자주 신장투석을 해야 했던 김 대통령은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단골병원이 가까운 동교동집을 생활하기 편한 구조로 재건축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동네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한 기쁨을 안겨줬던 대통령 김대중은 고양땅과의 인연을 3년이라는 짧은 시절로 마무리한다.
'반민주 반통일 세력의 역행 막아달라' 유언그는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민족화해의 길을 열기 위해 헌신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꿈꾸었던 평화의 길이 보수정권의 등장으로 퇴행하는 어두웠던 시절을 목도해야 했다. 김 대통령은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 반민주, 반통일 세력의 역행을 막아달라"는 호소를 유언처럼 남기고 2009년 8월 18일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도 시련과 맞닥뜨리는 운명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일까. 그러나 겨울을 이기는 꽃, 인동초라 불렸던 그의 별명처럼 그가 뿌린 민주와 평화의 씨앗은 기적처럼 다시 이 땅에 봄을 가져오고 있다. 재작년 겨울에는 들꽃처럼 연약해 보이는 이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국정농단을 심판했고, 올해 봄부터는 남과 북의 정상이 다시 만나 손을 잡는 놀라운 역사가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민주와 평화의 기적 같은 회생. 그 배경에서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크고 넉넉한 그림자를 본다. 반공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왜곡된 정치 프레임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며 소멸시효를 목전에 둔 지금이야말로 김대중 대통령의 꿈을 재조명하고, 그의 삶이 남긴 역사적 가치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닐까. 그 작업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바로 고양시일지도 모른다. 그가 한반도 평화의 원대한 구상을 하고, 대통령 당선의 기쁨까지 누린 역사적 장소가 정발산 산기슭 마을에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주인 없이 자리를 지켜온 김대중 일산 사저가 새삼 새롭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