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의 <징검다리 교육감>을 읽었다. 왜 이제야 이 책을 읽었을까? 몇 번이고 후회하고 아쉬워하면서. 읽었던 곳을 다시 돌아가 읽기도 하면서. 차가 없는 나는 징검다리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요즘처럼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버린 날은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다. 돌다리가 한두 개라도 물에 잠겨 있으면 남은 돌들이 멀쩡해도 징검다리는 쓸모가 없게 된다. 애써 온 길을 돌아갈 도리밖에는 없다. 지금 우리 교육계가 그런 것처럼.
혁신 교육의 상징인 김상곤 교육부장관이 경질되고, 유은혜 의원이 후임으로 내정되면서 말들이 많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유 의원의 지명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지면 관계상 그 이야기를 길게 할 순 없다. 솔직히 어떤 주장이 옳은 것인지 나로서는 판단이 잘 서지도 않는다. 나의 무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계의 주장을 가만 들어보면 교육을 말로만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감동적인 것은 말로만 '교육의 징검다리'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0년, 그가 서울교육감에 당선되면서 물려받은 '오체불만족 공교육'을 개선하고 혁신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실천적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하지만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부족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아쉬워하는 대목에서 더 큰 감동이 왔다. 참고로, 여기서 '오체'란 학생, 교사, 학부모, 시민, 정부를 가리킨다. 이 오체가 모두 불만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저자 곽노현은 "이 책을 쓰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는 말로 이 책을 시작한다. 그가 이른바 '사후 매수죄'로 교육감 직을 중도하차하게 되면서 뜻하지 않게 서울시민과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안긴 점이 늘 마음이 걸렸을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 아픔이 독자인 나에게 전해지기도 했지만 어딘지 생산적인 아픔처럼 느껴졌다. 길을 잃은 우리 교육에 대한 처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책머리를 읽다가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복음'이란 말 때문이다. "2부와 3부를 쓸 때는 이미 지나간 '내가복음'을 늘어놓은 게 무슨 소용일까 싶은 마음이 수시로 찾아왔다"고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그 웃음이 사라진 것은 다음 대목에서였다.
"엄정하게 되돌아볼수록 '뼛속까지 개혁가'의 자부심에 금이 갈 정도로 나의 결점과 한계가 뚜렷이 보여 작업을 중단하고 싶었다. 세월이 지나면 이토록 분명하건만 그때는 간과하고 오판한 것이 적지 않았다. 지금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엉성한 일처리를 다시 곱씹을 때면 몹시 당혹스럽다."(4쪽)
얼마나 솔직한 고백인가. 이 책에 신뢰감이 간 이유이기도 하다. 교육을 논하면서 자기주장을 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기 성찰을 동반하지 않은 자기주장은 독설이 되기 쉬울 뿐더러, 결과 없는 공허한 탁상공론으로 빠질 위험이 다분하다. 지금 우리 교육이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이유도 혹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마음의 옷깃을 여민 대목이다.
"나는 체벌전면금지를 최초로 선언하고 실천한 교육감으로 역사에 남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정으로 말미암아 내가 겪은 고통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옳은 일이지만 성급한 결정이었다. (…) 무엇보다도 내 원죄는 교사와 사전 대화를 통한 설득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다. (…) 체벌금지 조치는 그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교사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55쪽)
소중한 자기 성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불쑥 이런 물음이 일기도 했다. 체벌전면금지가 교사와 사전 대화를 통해서 실행해야 하는 사안인가? 만약 현장 교사들의 인권 감수성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고 해도?
전직교사인 나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누워서 침 뱉는 격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교사집단의 인권감수성에 대해서는 자성할 부분이 많다고 보는 입장이다. 체벌전면금지 조치가 위에서 내려왔든 아래로부터 왔든, 나로서는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었던 이유다.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정책 사업 덕에 공교육이 이만큼 발전될 걸까, 아니면 정책사업 탓에 공교육이 이렇게 정체된 걸까?" 하고 물음을 던진다. 정책사업이 교육부와 교육청이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 질문은 교육부와 교육청의 역할이 긍정적이었는지 부정적이었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저자의 대답은 부정적인데, 그 이유가 중요하다.
"정책사업을 수행할 현장의 평교사가 설계과정에서 배제되기 쉽다. 현장교사는 위에서 내려온 사업매뉴얼 지침대로 사업을 수행할 뿐이다."(177쪽)
특히 봄 학기에는 온갖 정책사업을 안내하는 공문이 쏟아진다. 학교는 스스로 생각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런 현상이 50년 넘게 고착된 끝에 현장은 무기력에 빠졌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 결과는 이렇다.
"독자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므로 무사유, 무성찰, 무비판에 빠져들었다. 자율성을 행사할 게 없음으로 자율성을 잃고서도 곡하지 않았다. 공교육의 진정한 위기는 바로 이것이다."(178쪽)
반대의견도 있을 법하다. 정책사업을 폐지하면 정책사업의 형식을 통해 특별히 의도했던 교육활동이나 변화가 학교현장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저자는 이 우려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학교의 자율성을 키우지 못한다"고 잘라 말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용돈을 주면서 책임지고 잘 쓰라고 하는 것과 일일이 용도와 한도를 정해서 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교육감으로서의 자기부정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학교가 잘 되려면 교육부장관이 교육적인 생각을 많이 할 게 아니라 학교가 교육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다. "학교에서 교장과 교사가 머리를 쓰고 교육부와 교육청은 손발이 되어 지원하는 게 옳은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책사업을 철폐하고 그 예산을 일반예산으로 돌려야 관료주의가 죽고 그만큼 학교가 살아난다는 것!
이 책 2부(공교육의 새 표준을 향하여)에는 원래 헌법학자였던 그가 교육계에 발을 들이는 배경이 소개된다. 그를 교육감으로 불러낸 것은 학생인권과의 조우였다.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 제정 자문위원장을 맡아 조례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그 후 자문위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5개월 만에 지금의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이 나올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저자는 공교육의 고통스런 실태에 눈을 뜨게 된다. 조례 성안 과정에서 최대한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면서 숱한 교장, 교사, 학생, 학부모를 만나고 난 뒤의 일이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관찰되는 민주주의의 왜곡과 파행이 민주주의 없는 공교육에서 잉태되고 재생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의 공교육을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민주주의와 진보의 미래, 좋은 삶의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65쪽)
문제는 그 해결방안이다. 생각에서 그치는 일이야 누군들 못하랴? 이 책은 서울의 첫 진보교육감으로서의 그의 교육적 철학이나 행적에 방점이 찍혀 있지 않다. 이 책의 미덕은 교육의 공공성과 학교의 자율성 회복을 위해 그가 교육감으로서 수행한 교육적 실천과 함께 행정과 실무와 관련한 실사구시적인 노력의 속살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지면관계상 학생인권과 친환경무상급식, 학교폭력에 맞서는 3대 해법 등과 관련하여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는지, 그 속살을 낱낱이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이 책의 3부(교육행정의 새 표준을 향하여)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의외의 수확들이 그득하다. 앞에서 언급한 정책사업 감축과 관련한 학교 자율성 회복을 위한 자세한 내용들도 접할 수 있다. '학생 행복지수, 학생들이 매긴 학교성적표', '원칙 있는 인사행정, 쪽지 인사와의 결별', '나 지금 떨고 있니? 사학비리와의 전면전' 등은 꼭지 제목만 읽어도 대강은 짐작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 중에서도 무릎을 칠 만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은 '교육격차 해소를 위한 교육행정의 매직넘버'인 '중식지원비율'과 관련한 내용이다.
매직넘버, 학교별 중식지원비율
"교장 선생님들을 만나면 열에 아홉은 자신이 책임진 학교가 아주 열악한 학교라고 진지하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라고 저자는 술회한다. 심지어 강남 지역 교장 선생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 교장을 만날수록 학교의 객관적 위상과 형편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중식지원비율'이다. 마침 무상급식이 최대의 화두였다.
무상급식(=중식지원)비율은 학부모 중 급식비를 내는 게 부담스러운 집단의 크기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학생이 모두 1000명인 학교에서 점심급식을 무상으로 제공받는 학생이 200명이라면 그 학교의 중식지원비율은 20퍼센트다. 중식지원비율만큼 학부모와 학교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지표는 없는 셈이다. 드디어 매직넘버를 찾은 것이다. 왜 매직넘버일까?
"학교의 중식지원비율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로는 어떤 교장 선생님을 만나도 걱정이 없었다. "선생님 학교는 ○○구에서 3번째, ○○○지역청에서는 5번째, 서울의 모든 중학교에서는 72번째로 형편이 나은 학교입니다."라고 이렇게 똑떨어지게 예기할 수 있게 되었다."(166쪽)
중식지원비율의 쓸모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저자는 교육장들과 회의나 모임을 할 때마다 관내에서 중식지원비율이 높은 학교는 직접 챙겨달라고 당부를 하기에 이른다. 학교급별로 최소한 5개교씩은 손바닥 보듯 상세하게 파악하고 최우선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의 학교에 교육활동에 열정적이고 혁신적인 교장과 교사가 상대적으로 많다면 정책사업비나 자치구지원금을 더 많이 따올 수 있을지 모른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가 되기 쉬웠다. 중식지원비율이 높은 학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모두에게 기피학교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앞으로 높은 자리에 가려면 반드시 열악한 학교에서 눈부신 성과를 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거기에 본청과 지역청의 장학관은 무조건 중식지원비율이 20퍼센트 이상인 학교로 나가야 한다고 못 박는다.
실제로 강남교육장부터 금천구의 고등학교로 발령을 냈단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난리가 났다. 하지만 "공교육다운 공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자지역과 낙후한 지역의 학교 간 교육 격차가 해소되어야 한다"는 뜻이 워낙 확고했고 명분도 강했다.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안다'는 말이 있다. 저자가 서울교육감으로 재직 시 자신에게 청탁을 한 사람이 전무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자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인사 청탁이나 이권 청탁을 안 들어주겠다고 선언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설사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중식지원비율로 인사를 단행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것이 쉬운 일일까? 아마도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오체불만족 공교육'을 살릴 생각밖에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 실행과정에서 부족한 경륜으로 인한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을 것이고, 나라의 교육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혁신교육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몽니도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억울할 만한데도 그의 방점은 주로 전자에 찍혀 있다. 이 책에 성찰의 언어가 가득한 이유다.
제 4장의 제목은 아예 '성찰과 제언'이다. '최선을 다했으나 그래도 아쉬운 것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교육개혁리더로서의 성찰'과 '정무직 직선교육감으로서의 성찰'을 통해 아프게 얻어낸 '시행착오로부터 얻은 교훈, 교육개혁 10계명'이 상세하게 소개된다. 제 8계에는 저자의 뼈아픈 시행착오를 통한 성찰이 반영되어 있다.
'현장 교사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삼아야 한다.'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은 "비단 교육개혁을 바라는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의 개혁 철학, 개혁 정책, 개혁 실무가 들어 있는 지침서다. 특히 학교 교육 개혁이 왜 현장교사 중심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교육을 고민하는 모든 사람이 새겨들어야 한다"라고 추천사에서 밝히고 있다. 책을 읽은 나로서는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일독을 권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