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총칼로 헌정체제를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 시절 '양승태 대법원'이 저지른 사법농단과 그것을 처리하는 최근 법원의 행태를 보면 쿠데타는 무기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법관들이 '법'을 흉기 삼아 사법부의 독립을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주권자들을 농락하고 있으니 말이다.
'양승태 게이트'라고 불러야 마땅한 사법농단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지난 7월 31일이었다.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196개의 문건에 기록되어 있는 사례들은 사법부의 수장이 박근혜 정권과 어떻게 '재판거래'를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검찰이 지난 7월 말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강제수사를 시작한 뒤 법원은 압수수색 영장을 91%나 기각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이 흐른 지난 10일,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박범석)가 유해용(전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세 번째 영장을 기각한 것은 '사법 쿠데타'의 서막이나 다름없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법원의 결론
"대법원 재판자료를 반출해 소지한 것은 대법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부적절한 행위이나 죄가 되지 않는다", "이 자료를 수사기관이 취득하면 재판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 등이 기각 사유였다. 공무상 비밀누설,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절도 등에 대한 형사책임을 도외시한 채 단순히 '부적절한 행위'라고 규정한 것이다.
차관급 법관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뒤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인물이 재임 시에 다루던 자료를 가지고 나간 사실을 검찰이 확인했는데도 영장담당 부장판사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게다가 그 부장판사는 유해용이 대법원 선임재판연구원으로 있던 때 그 아래서 재판연구관으로 일한 바 있는 사람이다.
법원이 '전 직속상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심리를 '당시 부하'에게 맡긴 것은 법리적으로는 물론 상식으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부장판사는 영장 기각 결정을 무려 3일이 지난 뒤에 내렸다.
더 해괴한 사건은 그 뒤에 터졌다. 3차 영장 기각 직후 대법원이 "유해용 변호사가 지난 6일 2차 영장이 기각된 뒤 출력물 등은 파쇄했고, 컴퓨터 저장장치는 분해해 버렸다"고 밝힌 것이다.
양승태 게이트의 주요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들을 고의로 없애버렸다는 데도 김명수 대법원장은 자체 조사를 하겠다는 등의 명확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 법관들이 자의적으로 '사법 쿠데타'나 다름없는 처사를 일삼고,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가 증거인멸을 자행하는 데도 사법부 수장으로서 '나는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는가?
사법부 안에서는 그나마 일선 법관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지난 10일 경기도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임시회의를 열고 이렇게 의견을 모은 것이다.
"사법행정권의 남용을 방지하고 법관의 독립을 충실하게 보장하기 위하여 현행 사법행정구조에 대한 전면적 개편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법관회의 추천 법관, 외부 위원 등이 참여하는 별도의 추진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이런 기구를 만든다고 사법부 안에서 법의 이름으로 쿠데타가 저질러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뜻인가?
김명수 대법원장의 모호함... 추락하는 사법부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 7명은 지난 11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밝혔다.
"그동안 사법부의 온전한 독립과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 근간을 지키기 위해 사법부의 결자해지를 기다려왔다. 하지만 최근 드러나는 사법농단 실체와 증거인멸 시도 등을 접하고 더는 사법농단 사태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국회 차원에서 사법농단의 실체를 파악하고, 사법농단 수사에 비협조적인 사법부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거래 등 위법행위가 드러나면 해당 법관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시기에 집권당이던 현재 제1야당이 국정조사에 선뜻 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범여권'으로 불리는 정당들의 국회의원들이 양승태 게이트를 주축으로 하는 '사법 쿠데타'의 진상을 밝히고 주모자들을 응징하기 위한 특별검사법을 제정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다시 강조할 수밖에 없다.
사법 정의 없이 사회 정의가 구현될 리 없다. 김명수 대법원은 이제부터라도, 법의 이름으로 쿠데타나 다름없는 행위를 일삼는 법관들을 깨끗이 정리하는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만신창이가 된 사법부는 앞으로도 국민의 신뢰를 전혀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종철(1944년생)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서울대 국문학과에 재학중이던 1967년 11월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하지만 1975년 3월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됐다. 이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공동대표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거쳐 <한겨레> 논설위원과 <연합뉴스> 대표, 사단법인 ‘한국·베트남 함께 가는 모임’ 이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 동아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유라시아문화연대 이사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민주주의국민행동 공동대표, 2016민주평화포럼 상임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는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오바마의 미국, MB의 대한민국>, <세시봉 이야기>, <박근혜 바로보기>, <폭력의 자유>, <문화의 바다로>(전 5권), <동아일보 대해부>(전 5권), 5권, <조선일보 대해부>(공저, 전 5권), <촛불혁명의 뿌리를 찾아서-1980년대 민주민족민중운동사>(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