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입국한 3만 명의 탈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이다. 하지만 학교, 직장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탈북'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큰 무게이다. 북한이라는 뿌리 없이 이들의 삶을 말할 수 없지만, 이제는 탈북자보다는 한국인 청년으로 불리고 싶은 7인을 만났다. 각 스토리는 <미디어눈> 에디터들이 탈북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기사에 사용된 이름, 나이, 지명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사전에 밝힌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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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멀어져가는 꿈,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 상상 속 한국. 더는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 아직 꿈꿀 기회가 있다면 그곳으로 떠나자! 나는 그렇게 탈북을 결심했다.
국경까지 가는 것이 어렵지 국경을 넘는 것은 별일 아닐 것 같았다. 군 생활 6년 차인데 군인 다루는 것쯤이야 어려울까 싶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어설픈 계획을 세워 국경지대까지는 도착했다. 그리고 밤이 깊어 강물에 발을 담갔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경비병이었다. 고요한 밤에 자갈 밟는 요란한 소리를 경비병이 못 들을 리 없었다.
군인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총으로 나를 겨누었다. 그 순간 눈앞에 작은 총구멍이 대포 구멍처럼 커 보였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니 그제야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군대 짬밥을 먹은 것이 헛되진 않았나 보다.
총에는 공포탄이 3발 장전돼 있을 것이다. 공포탄 3발 발사될 때까지 냅다 뛰면 도망칠 수 있다. 심호흡을 하고 셋을 쉬고 달렸다. "탕" 한 발이 발사되고 "탕" 연이어 두 발이 발사됐다. "탕" 세 발이 발사됐지만, 다행히 예상대로 공포탄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빨리 뛰기는 처음이었다. "탕" 실탄은 다행히 빗나갔고 나는 간신히 그곳에서 달아났다.
그 후 며칠간 숨어 지냈다. 한 번 죽음의 문턱에 서보니 다시 강을 건너기가 두려웠다. 총에 맞아 죽지 않아도 잡혀서 군부로 끌려갔다면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상상이 안 갔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대신 브로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며칠 뒤 브로커의 도움으로 간신히 국경을 넘었고, 그 후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삶과 죽음의 국경을 넘는 긴 시간을 보냈다. 하루가 백일 같고 지금도 자다가 가위에 눌리는 그때 기억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다.
'시크릿 가든'은 환상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인천 공항에 발을 딛고 나서야 안도감이 찾아왔다. 살았구나. 그리고 꿈에 그리던 시크릿 가든 속 세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 앞에 펼쳐질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차올랐다.
하나원*생활을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 그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하나원을 나오고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불안해졌다. 그리고 현실을 깨달았다. 시크릿 가든은 판타지라는 것을.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모든 것은 내가 해결해야 했다. 꿈꾸는 것을 이루려면 나의 손으로 삶을 개척해야 한다.
겁이 났다. 누구 하나 여기로 가라, 저기로 가라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물건 하나 사는 것도 어디서 사야 할지 모르고,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보고 싶던 아버지를 만나긴 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각자에게 서로의 삶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헤어져야 했다. 결국, 혼자서 이 삶을 헤쳐나가야 했다.
*하나원: 정식명칭은 '북한 이탈 주민 정착지원 사무소'로 북한 이탈 주민을 교육하는 통일부 소속의 교육 및 정착 도움 기관. 처음 입국한 탈북민들은 의무적으로 하나원에서 합숙 교육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어려움도 있었다. 한 번은 명동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근처에 있던 청년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가려고 했는데 내 말투를 듣더니 "어디서 짱깨 새끼가 담배를 피우고 개지랄이야"하고 욕을 하고 몸을 툭툭 건드려 댔다.
정중하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이번에는 얼굴을 건드렸다. 다시 내 얼굴을 치려는 순간 그 손을 잡아서 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부탁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손으로 다시 얼굴을 치려고 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급소를 걷어차 버렸다. 그랬더니 뒤에 있던 다른 두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아무리 싸움박질을 하면 컸지만 3명을 혼자 상대하기는 버거웠다.
안 되겠다 싶어서 가방에서 운동하려고 가지고 나온 근력 단련용 기구를 꺼내서 휘둘러서 세 명을 모두 쓰러뜨렸다. 일단 위기는 모면했는데 덜컥 겁이 나서 도망쳤다. 곧바로 담당 형사(탈북민을 관리하는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니 '당장 그 자리로 돌아가서 있으라'고 엄청나게 혼을 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더니 싸움을 건 청년들이 이미 경찰에 신고한 뒤였다.
왜 경찰서를 가야 하는지도 몰랐는데 경찰차에 탔다. 북한에서는 남자들끼리 싸우면 경찰이나 누가 와서 간섭하지 않는다. 그냥 뒷산에서 치고받고 정리가 된다. 경찰서로 가서 CCTV를 돌려보니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주먹을 쓴 것도 저들인데, 문제는 내가 들었던 운동기구가 흉기라고 했다. 내 잘못이 더 크다는 결론이었고 합의를 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여기서 지켜야 할 법과 규범, 그리고 행동에 따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는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북에서는 출신배경, 남에서는 대학... 너무 화가 났다
한국 생활이 고될수록 북의 가족들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하루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를 모셔오고 싶다. 작년에는 돈을 벌려고 안산에 있는 자동차 공장에 취직했다. 다행히 자동차를 다루는 일이 적성에 잘 맞았다. 일이 손에 익어갈 무렵 팀장이 퇴사해서 팀장 자리에 공석이 생겼다. 주변에서 다들 저 자리는 '철이 너 말고 누가 할 수 있겠느냐'라며 바람을 넣었다. 욕심이 없었는데 계속 말을 듣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느샌가 일이 능숙해져 공장 내에 내가 일을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내심 기대가 생겼다.
하지만 발표를 듣고 속이 쓰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팀장으로 진급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늦게 들어온 동갑내기 후배였다. 실수도 많이 하고 입사도 늦게 한 친구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갖고 있던 것이 바로 대학 졸업장이다. 일을 잘하고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 일은 못 하는데 대학 졸업장이 있는 사람. 아니 일만 잘하면 되지, 졸업장이 그렇게 중요한가?
북에서는 출세하려면 출신 배경이 좋아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대학을 나와야 하는구나. 너무 화가 났고 그날부로 회사를 그만뒀다. 나도 대학 가고 만다.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고민 끝에 물리치료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나중에 통일되고 나서도 북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북에서는 사회복지 시설이 열악하다 보니 노인들의 고생이 심하다. 나이 들어서 아파하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떠올리며 내가 열심히 배워서 아픈 어르신들을 조금 더 편하게 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올해 18학번 늦깎이 신입생이 됐다. 오랜만에 하는 공부도 적응이 필요하지만, 친구들과의 관계도 노력이 필요했다. 북한 출신이라고 나를 피하고 거리를 두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탈북한 친구들은 탈북했다는 사실을 숨기기도 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숨긴다고 숨겨질 수도 없고, 내가 탈북한 게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숨겨야 하나 싶어서 당당히 알린다. 물론 아직은 어색한 티가 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적응해가는 나를 조금만 기다려 줬으면 좋겠다. 나도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더 마음을 열려고 노력한다.
대학 와서 제일 좋은 것은 마음대로 짜는 시간표다. 북에서는 '이것 해라', '저것 해라', 모든 것을 다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음대로 수업을 고르고 시간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대학교 시간표뿐 아니라 자고 싶을 때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무엇보다 꿈꿀 수 있는 자유, 이 자유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꿈을 꿀 수 있어 행복
학교 마치면 바로 자고 자정에 일어나 야간 알바를 나가는 이 시간이 고되지만 꿈을 꾸면 행복하다. 물리치료사가 되어 누군가를 돕는 꿈,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꿈,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꿈, 무엇보다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꿈. 그날을 꿈꾼다. 통일의 날,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에 가는 그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명절, 어머니 생신, 내 생일, 지치고 힘든 하루, 그럴 때면 어머니가 더 보고 싶다. 가까이 있지만 볼 수 없는 그 얼굴이 너무 그립다.
왜 그렇게 속만 썩이고 살았을까. 싸움 좀 작작할걸. 철없는 이 아들은 이제야 후회를 한다. 우리에게는 새 신발을 사주면서 자신은 왜 그렇게 낡고 헤진 편리화(운동화)만 신고 다녔는지. 엄마의 그 마음을 이해 못 하고 미워하고 원망했던 것이 죄송하다. 살아계실 때 속만 썩인 아들을 용서해달라고 꼭 전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만나서 따스한 밥도 지어드리고, 우유도 맨날 사드릴 것이다. 무엇보다 새 신발 한 켤레를 꼭 사서 신겨 드리고 싶다. 어머니 그때까지 건강하시길.
그날까지 나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힘이 들면 어떻고 실수하면 어떠냐, 살아만 있으면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행복한 꿈을 이루는 그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나는 꿈꾸는 대한민국 청년 김철이다.
취재. 글: 조은총 에디터 l 삽화: 은성 작가
덧붙이는 글 | 미디어눈 팀 블로그에도 연재중입니다. https://brunch.co.kr/@medianoon/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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