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리스트 실행 혐의와 위증죄로 지난 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은 허현준 전 청와대 행정관의 페이스북 글이 화제다. 그가 페이스북에서 문재인 정부를 빗대 표현한 '궁예 관심법'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허 전 행정관은 민족해방(NL) 계열 학생운동가로 전북대 총학생회장과 전북총련 의장을 지낸 적이 있다. 보수 진영에 들어간 뒤에는 뉴라이트 단체인 '시대정신'의 사무국장을 지내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선임행정관으로 일했다.
이번에 그가 재판을 받은 것은 대기업들을 움직여 어버이연합 같은 보수단체를 지원하도록 한 혐의, 즉 화이트리스트 실행 혐의 때문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헌법은 특정 정치 견해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데, 피고인들은 함부로 진보·보수가 불균형 상태라며 보수단체를 지원했다"라면서 "이런 행동의 경위와 파장에 비춰보면 비난 가능성이 적지 않다"라고 판시했다.
김기춘·조윤선·현기완 등도 함께 재판을 받았다. 허현준씨를 포함한 이들이 '박근혜 정부 당시에 진보·보수가 불균형이라서 보수를 지원했다'는 논리를 편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을 구속시키는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허현준씨가 내놓은 반박문이 바로 페이스북 글이다. 유죄가 선고되고 구속될 경우를 대비해 가족들에게 사전에 맡긴 글이다. 글 말미에 "이 글은 가족이 대신 올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글에서 허현준씨는 이렇게 말했다.
#급진적좌익독존 #궁예관심법의망령
"급진적 좌익의 독존(獨存)은 우리 사회의 근본을 흔든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잘못이 아니다'라는 교만과 독선적 행위가 윤리적 질서를 해체하고 있다. 민주공화국 내부의 경쟁자는 '적'으로 간주하고 주민을 노예로 지배하는 독재자는 '친구'가 되는 도덕적 파괴가 거침이 없다."
'급진적 좌익'의 '좌익'을 '우익'으로 바꿔놓으면 딱 맞는 내용이 될 듯하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기업과 유착해 어버이연합 등을 지원해 윤리적 질서를 해쳤다는 비판을 받는 게 박근혜 정부인데, 그는 급진적 좌익이 윤리 질서를 해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상을 잘못 고른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민주공화국 내부의 경쟁자는 적으로 간주하고'라는 대목도 흥미롭다. 이 말에 따르면, 그가 평소에 진보 진영을 적이 아닌 경쟁자로 생각했다는 말이 된다. 그의 글에서 진하게 풍겨 나오는, 진보 진영에 대한 적대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페이스북 글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궁예 관심법'에 관한 언급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궁예의 관심법'의 망령이 살아나 명확한 증거가 없는데도 '묵시적 청탁'이라며 대통령을 구속하는 상황에서, 힘도 없는 나를 또 구속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짜 놓은 적폐청산 게임판에 던져진 졸인데 말이다."
궁예의 관심법(觀心法)은 구체적 입증 없이, 수행에 기초한 직관력으로 상대방의 마음과 행적을 알아내는 것을 뜻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무수한 비판 속에 과장된 부분도 물론 없지 않다. 하지만, 그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는 넘친다. 박근혜를 여전히 지지하지만 그의 유죄만큼은 부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게 '모든 게 최순실 때문'이라는 논리다. 2017년 10월 26일 개봉된 다큐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에 출연한 박사모 회원의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다.
박정희 생가 내부의 박정희 동상에 연거푸 큰절을 하던 그 여성 회원은 박정희 시절을 추억하면서 "얼마나 살기 좋았어요"라고 말한 뒤, 박근혜의 죄악에 관한 말이 나오자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최순실 저 나쁜 O한테 걸려가지고"라며 "그 O도 보나마나 좌익에 걸려들었을 거야! 뻔해"라고 열변을 토했다. 박근혜의 죄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되 최순실과 진보 진영한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친박의 대응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근혜씨의 죄를 허현준씨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검찰이 구체적 증거도 없이 궁예 관심법으로 박근혜를 유죄로 몰았다는 주장이다. 자기 역시 관심법의 피해자가 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허현준씨는 운동권 리더였다. 논리와 주장에 더욱 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다. 그런데도 궁예 관심법을 운운하며 엉뚱한 주장을 편다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보수 전체의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대중의 비웃음을 사지 않을 이론가를 찾기 어려운 한국 보수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관심범 등장 배경
사실 허현준씨가 비판한 궁예 관심법 속에는 긍정적 측면이 적지 않다. 궁예를 싫어하는 김부식이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서 우스꽝스레 묘사해서 그렇지, 궁예가 역사의 패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의 관심법도 결코 가벼이 취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관심법을 내세워 정적을 처단한 행위 자체는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궁예의 정적이 누구였는가를 살펴보면, 그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궁예가 활동한 9, 10세기의 지배층은 호족이었다. 군주가 부여한 작위에 기초해 지위를 얻는 귀족과 달리, 호족은 독자적인 군사력 및 경제력에 기초해 지위를 얻은 세력이다. 이들과 타협할 목적으로 군주가 관직을 수여하기도 했지만, 그런 관직은 이들의 위상을 결정하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었다. 이들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독자적 역량에 기초한 것이었다.
발해·신라 남북국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 활약한 이들 호족들로 인해 우리 민족이 겪은 위기는, 국가가 백성이나 왕실의 관점이 아닌 호족들의 관점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이다. 나라가 엉뚱한 방향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부인을 29명이나 뒀던 것은, 호족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들과 결혼동맹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후백제 견훤 역시 마찬가지다.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서는 "견훤은 아내를 많이 뒀기 때문에 아들이 10여 명이나 됐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 역시 호족 딸들과 정략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왕건뿐 아니라 견훤도 호족들에게 휘둘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궁예는 정략결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궁예한테는 강씨 부인 한 명과 자식 두 명밖에 없었다. 정략결혼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호족과의 타협보다는 호족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시키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예의 나라에서는 호족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견훤·왕건의 나라에 비해 궁예의 나라가 상대적으로 건전했던 것이다.
이렇게 호족의 영향력이 낮았기 때문에 궁예가 제대로 된 재판도 거치지 않고 호족들을 처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현준의 말마따나 "명확한 증거가 없는데도" 오로지 관심법을 내세워 '나는 네 죄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궁예 정권이 호족들의 자금 지원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별로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궁예의 나라에서 호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해도, 호족은 어디까지나 호족이었다. 이들은 일반 평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죄를 짓는다 해도 정상적인 재판 절차로는 이들을 가두기 힘들었다. 법망을 얼마든지 뚫고 나갈 수 있는 세력이었다.
만약 정상적인 재판 및 입증 절차를 통해 그들을 억누르려 했다면, 궁예는 사회개혁을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관심법을 내세운 숙청 작업의 결과로 918년에 송악(개성) 호족인 왕건의 쿠데타를 자초하기는 했지만, 901년 등극한 궁예가 18년간이나 호족들을 억누르며 신체제 건설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관심법 같은 약식 사법절차로 10세기판 적폐청산을 신속히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에 관심법이라니
결과적으로는 정권을 빼앗기고 역사의 패자가 됐기 때문에 할 말이 없게 됐지만, 궁예의 관심법 만큼은 결코 비웃음을 살 만한 게 아니었다. 명확한 증거 없이 사람을 죽이는 데 악용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정상적 사법절차로는 쉽게 청산할 수 없는 기득권층을 억압하는 데 관심법이 유효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자기 손에 피 묻히는 것을 좋아하는 군주는 거의 없었다. 사법권이 군주에게 있었으므로 자신이 직접 사형 판결을 내릴 경우에도, 신하들을 참여시켜 어전회의를 연 뒤 판결을 도출했다.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궁예 같은 인물이 그런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한 것은, 일반 사법절차로는 기득권층을 제어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관심법을 이용한 약식 절차를 안출해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궁예가 관심법을 동원한 것은 개혁을 밀어붙이는 그의 과단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화이트리스트 재판에 불만을 품은 피고인이 종이에 끄적거리듯이 비웃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허현준씨는 문재인 정부가 그 같은 관심법을 적폐청산에 활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은 한때나마 운동권 관점으로 세계를 냉정하게 분석했던 인물의 글에서 나올 만한 것은 아니다. 냉정한 분석의 결과로 나올 만한 진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관심법을 쓰고 싶어도 쓸 여력이 없다. 재벌과 보수를 압도할 여력이 없다. 삼권분립 이념에 충실하다 보니 검찰과 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궁예 관심법을 쓸 생각도 없겠지만, 실행에 옮길 만한 권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
문재인 정부의 객관적 환경으로 보나 주관적 의지로 보나, 관심법 같은 것이 적폐청산에 활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그것을 운동권 리더 출신이 모른다거나 모른 척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궁예 관심법을 문재인 정부에 대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