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긴 하지만 정작 의미를 따져 물으면 대답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있다. 가령 '평화'와 같은 말.
평화란 무엇일까? 조용한 상태? 갈등과 분쟁이 없는 상황? 사전에 따르면 평화는 '평온하고 화목'하거나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물론 이 정도의 정의도 '평화'라는 개념을 사유하기에 부족함이 많지만 사실 이를 숙지하고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래서 오용되고 남용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어 '군사적 개입을 통한 평화 달성'과 같은 말들. '군사적 개입'이 시작되는 순간 평화가 깨져버리는데 그러한 방식으로 분쟁과 갈등을 없앤다는 게 가능할까? 개입이 끝난 후에 과연 평화를 달성할 수 있을까?
아마 사랑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정작 '사랑은 무엇인가?'를 물으면 역시나 답을 하기는 만만치 않다. 이 역시 우리가 몸에 밴 버릇처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다. 별다른 고민 없이 쓰는데 익숙한 말이란 의미다.
그래서인지 '사랑' 역시도 앞서 예로 든 평화만큼이나 잘못된 곳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많은 언론이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을 '엇나간 사랑', '사랑이 불러온 비극'이라고 지칭한다. 의아하다. 사랑하는데 왜 상대방을 때리고 학대할까. 사랑은 둘 다 했는데 왜 폭력은 일방적으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향하는가. 그렇다면 원인을 사랑으로 잘못 지목한 게 아닐까. 즉, 저 말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를 오용한 사례가 아닐까.
사랑하니까 반대한다?
이런 오용의 사례가 또 하나 발견됐다. 전직 축구선수이자 현직 해설위원인 이영표가 쓴 책에서다. 그는 지난 5월 출간된 책 <생각이 내가 된다>에서 "동성애를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 이런 주장을 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동성애를 행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되, 동성애라는 행위 자체는 죄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영표뿐만이 아니다. 퀴어문화축제를 방해하고 혐오발언을 일삼는 혐오집단들도 최근 들어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혐오 행사를 '레알러브 시민축제'(농담이 아니라 정말 이름이 저렇다), 즉 '진짜 사랑'이라고 지칭하거나 혹은 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에게 '사랑한다, 돌아오라'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문구를 뽑자면 아마 '사랑하니까 반대한다'가 아닐까 싶다.
사랑하니까 반대한다? 그러니까 광장에 난입해 축제를 방해하고 도로에 눕고 트럭 밑으로 기어 들어가며 행진을 막은 모든 행위가 사랑해서 한 것이라는 뜻일까? 깃발과 피켓을 내리라고 요구하고 아예 깃대를 부러트린 그 모든 행동이?
퀴어문화축제는 무엇보다 성적소수자들이 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자긍심을 표현하는 현장이다. 이를 막는 것은 성적소수자들을 사회에서 지워버리는 것, 즉 존재 자체를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성적소수자들의 고유한 삶을 부정함을 뜻하기도 한다. 의아하다. 도대체 그들이 하는 '사랑'은 어떤 것이기에 이런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 것일까.
어떤 사랑에도 걸맞지 않은 혐오 집단의 행동
사랑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정의를 살펴보기 위해 책 <페미니즘의 개념들>을 펼쳤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한 기본적 정의를 이렇게 정리한다.
"넓은 의미에서, 자신이 불완전자임을 자각하고 완전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나아가려는 인간의 정신 또는 철학자의 정신인 '에로스'와, 친구나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 사회적 공감이나 교감인 '필리아', 종교적인 무조건적 사랑.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나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실현되는 인간의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인 '아가페' 등을 포함한다."
물론 이 책은 사랑에 대한 보다 폭넓은 논의를 전개하지만 여기서는 거칠게 기본적 정의만 놓고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혐오 집단들이 대부분 보수 개신교계라는 종교적 기반을 두고 있다 해서 이들이 보인 사랑을 '아가페'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의 사랑에는 '당신들이 성적소수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이 걸려있다. 즉,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지 않다. 혐오 집단은 자기를 희생해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성적소수자들이 자기 삶을 희생하고 이성애 중심적인 기준에 맞추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사랑은 결코 '아가페'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사랑은 '필리아'인가? 소수자의 존재와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틀렸다고 배제하는 혐오 집단의 행동에서 어떤 사회적 공감과 교감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또한 아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는 '에로스'인데, 자신을 '불완전자'라고 자각하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회적 집단을 함부로 규정하고 여기에 기반을 둔 편견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이들이 말하는 '사랑'은 전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고 혐오다
앞서 나는 '사랑'을 오용한 사례로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을 '엇나간 사랑' 또는 '사랑이 불러온 비극'으로 명명하는 일을 언급했다.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은 대부분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거나 관계가 마음대로 이어지지 않을 때 발생한다. 남자들은 회유하거나 설득하거나 수용하지 않는다. 왜? 두 폭력은 긴 시간 동안 범죄는커녕 폭력으로조차 명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실질적인 법적 처분이 제대로 내려지는 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남자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질러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의 원인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을 써서라도 상대방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이다.
'사랑하니까 반대한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반대는 성적소수자들의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이 절대 고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누가 요구한다고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전환 치료'가 만들어낸 끔찍한 부작용이 보여주듯 인위적인 개입을 통해 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혐오 집단은 이 불가능한 통제를 욕망한다. 그래서 부러 성적소수자들이 모이는 축제에 찾아와 훼방을 놓고 폭력을 저지르며 혐오 행위를 일삼는다. 가짜 뉴스를 퍼트려 여러 사회적 집단을 모욕하고 혐오를 전파해 소수자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공간을 줄어들게 만든다. 성적소수자로 존재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도록 만들어 존재를 지우려는 것이다.
이러한 혐오와 폭력은 지금껏 이 사회에서 충분히 심각하게 문제시된 적이 없다. 당연히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도 폭넓게 공론화된 적도 없다. 그러니 결론은 같다. 사랑은 반대의 이유도 원인도 아니다. 여기에는 오직 폭력과 이를 가능케 한 방관만이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사랑해서 반대한다는 식의 모순에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고 혐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폭력과 혐오를 종식할 전사회적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