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쓴 박정희 추모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1951년 출생해 박정희 시대에 10대와 20대를 보낸 그는 10·26 사태 39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당신이 떠나신 후 39년 세월 동안 민주화가 도를 넘어, 당신의 따님은 촛불혁명으로 탄핵당하고 구속되어 3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라며 박정희를 '잘못' 평가했던 젊은 시절을 참회했다.
"경부고속도로가 히틀러의 아우토반처럼 독재강화 수단이라는 선배들의 가르침대로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36년 뒤 제가 도지사가 되어서야 경기북부 지역 발전을 위해 고속도로가 필수적임을 깨닫고 당신의 선견지명에 반대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고속도로에 이어 그를 '회개'케 한 소재는 자동차 산업이다. 그의 참회는 이어진다.
"마이카 시대를 외치던 당신을 향하여, 히틀러 나찌 시대의 폭스바겐식 선동이라며 우리는 반대했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나라가 세계 5대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습니다. 제철·자동차·조선·중화학·전자, 당신은 최고의 산업혁명가였습니다."
김문수보다 훨씬 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잘 아는 쪽이 있다. 박정희보다 우월한 정보력을 갖고 그를 항상 관찰했던 미국이다. 미국은 CIA·미국대사관·주한미군을 통해 박정희를 세밀히 파악했다.
그런 미국이 볼 때,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재벌을 살찌우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 그 자신과 정권을 살찌우는 것이었다. 정권과 재벌을 위해 국민들을 경제개발에 동원하는 모습이 미국의 눈에 포착됐던 것이다. 도널드 프레이저가 위원장인 하원 국제기구소위원회가 1978년 발간한 <한미관계 보고서>, 일명 <프레이저 보고서>에 상세한 증언이 수록됐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결국 배부른 자들은...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차관을 얻어오면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정권이 수수료를 챙기거나, 미국 공법 제480호(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에 근거한 농산물 원조라 하여 'PL-480 원조'로 약칭되는 경제지원이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으로 전용된 일이 많다는 사실은 이미 언론 보도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를 읽다 보면, 그 정도에 놀라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경제개발의 결실을 자신들의 치부에 이용하는 박정희 정권의 실상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박정희는 국내 기업의 해외 수출만 도운 게 아니라, 외국 기업의 국내 활동도 은밀히 지원했다. 그것이 이익이 됐기 때문이다. 정치자금이 생기는 일이었던 것이다. 박정희한테 뇌물을 제공한 미국 석유회사 걸프오일에 관해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1975년) 5월 16일의 공청회에서 걸프오일 주식회사는 전 세계에 걸쳐 지불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외국 정치기부 중 80%가 민주공화당으로 갔다고 공개했다."
걸프오일이 전 세계에 뿌린 검은 기부금의 80%가 박정희 정권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걸프오일뿐 아니었다. 다른 나라 기업들도 박정희 정권에 뭔가를 주고 한국에서 돈을 벌어갔다.
"외국 기업들 역시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정치자금을 조성하는 데 이용됐다. ······ 칼텍스 석유회사는 적어도 100만 달러를 제공했다. ······ 행정부 보고서는 또 다른 미국 기업의 한국인 대리인이 수수료로 청와대에 수백만 달러를 약속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 한국의 지하철 차량 판매에 연루된 4개의 일본 무역상사들이 미국 은행계좌를 통해 120만 달러를 송금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정보 수집 못지않게 '자금 수집'을 위해서도 활용했다. 중앙정보부를 주식시장 '작전 세력'으로도 활용했다.
"워커힐 리조트 건설과 일본제 자동차 수입과 같은 상업적 거래들에 한국 중앙정보부가 깊이 빠져들었다는 믿을 만한 표징들이 있다. 그 후 한국 중앙정보부가 워커힐 프로젝트에서 수백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봄에 한국 중앙정보부는 주식시장의 은밀한 조작에 휩쓸려 들어갔고, 이 공작으로 거의 4천만 달러를 챙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 돈들은 대통령 탁자 뒤 금고에..."
그런데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미국 측이 황당해 한 부분이 있다. 5·16 쿠데타 직후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기소된 기업들이 어느새 정권의 후원자들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1970년 6월 민주공화당에 십만 달러씩을 기부할 한국 기업들의 명단을 작성하라고 김성곤에게 직접 지시했다. 그 명단에는 한국의 거대한 재벌들인 럭키그룹·현대건설·삼성그룹과 김성곤이 경영하는 쌍용그룹이 포함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기업 총수들의 다수는 1961년과 1962년 사이에 박정희 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기소됐었다."
경우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 아무한테서나 정치자금을 흡수하다 보니, 박정희 자신이 '떼부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돈들은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 탁자 뒤의 금고 안에 보관되었다고 한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박정희뿐 아니라 부인 육영수도 별도의 정치자금을 관리했다고 한다. 보고서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말을 인용해 "박 대통령과 박의 부인(육영수), 정일권·이후락·박종규 등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비슷하게 제공된 자금들도 김성곤이 보관했다고 증언했다"고 말한다. 공화당 자금책 김성곤이 육영수 비자금도 따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또 박정희의 측근들도 떼부자가 됐다. "1970년경에는 이후락·김성곤·김형욱이 각각 축적한 개인 재산이 1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 청와대 고위급 관리가 말했다"고 보고서는 증언한다.
미국은 박 정권이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한 동기도 정치자금 확보에 있다고 파악했다. 미국의 경제원조가 줄어들면서 정치자금을 확보할 기회가 축소되자, 일본 기업들을 새로운 자금원으로 삼고자 한일협정 체결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어느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급격히 줄어드는 미국 원조를 대체하기 위해 일본 자금원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일본과의 협정이 체결된 1965년 6월 직후, 민주공화당 자금을 조달하고 정부 핵심 관리들을 살찌울 지속 가능한 돈세탁 시스템이 수립되었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한일협정 체결 뒤의 '후속 조치'로 돈세탁 시스템부터 구축했다는 것이다.
새벽종은 정권과 재벌만 살찌웠다
박정희 시대에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라는 '새마을 노래'가 국민들의 노동 의욕을 고취하는 데 활용됐다. 그렇게 국민들의 새벽잠을 깨워가며 산업생산을 독촉한 결과로, 정권과 재벌만 살찌고 대다수 국민들은 배고픔을 면하는 데 그쳤다. 그런데도 김문수는 박정희를 찬미한다.
"'하면 된다'던 당신을 향하여 '할 수 없다'고 침을 뱉던 제가, 이제는 당신의 무덤에 꽃을 바칩니다. 당신의 꿈은 식민지 시대의 배고픔과 절망에서 자라났지만, 역사를 뛰어넘었고 혁명적이었으며 세계적이었습니다."
지금의 김문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던 일부 국민들이 박정희 죽음을 슬퍼하던 1979년 10월 하순, 한쪽에서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축적해둔 거대한 정치자금을 은밀히 빼돌리는 작업이었다. 최순실의 의붓오빠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산관리인이었던 조순제. 그의 아들 조용래가 아버지한테 들은 내용을 토대로 집필된 <또 하나의 가족- 최태민, 임선이 그리고 박근혜>에 이런 대목이 있다.
"박정희 사후에 조순제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박정희가 남긴 돈을 최태민 일가 쪽으로 옮기는 데 관여한 것이다. 금덩어리도 나왔고 달러와 채권 뭉치도 나왔다. 외국 은행의 비밀계좌에서도 돈이 나왔다."
실상은 이랬는데도 김문수는 박정희를 찬양한다. 그의 추모 글은 다음 두 문장으로 끝난다.
"당신의 업적은 당신의 비운을 뛰어넘어, 조국과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당신의 무덤에 침을 뱉는 자조차도 당신이 이룬 업적을 뛰어넘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