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미국이지만 다르다. 북한을 대할 때와 이란을 대할 때 미국의 태도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11월 5일부터는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가 한층 강해진다.
2015년 7월 14일 이란과 미국·독일·프랑스·영국·러시아·중국 사이에 '이란 핵합의'가 체결됐다. 핵개발 프로그램을 제한하는 대신,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합의였다. 이 합의가 올해 5월 8일 깨지면서, 미국의 경제제재가 이란을 압박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이 합의에 불만을 표시했다. 2015년 저서 <불구가 된 미국> 제1장에서 그는 이란 핵합의를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합의 중 하나"라고 혹평하면서, 이란을 신뢰할 수도 없고 검증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이스라엘을 파괴하겠다"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며,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이란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이면합의를 일반 미국인들이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결국 트럼프는 이란 핵합의를 파기하고, 지난 8월 7일 제1단계 제제를 발동했다. 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 개인 및 기업에 대한 세컨더리 보이콧이었다. 이번 11월 5일부터는 2단계 제재에 돌입한다. 원유·석유제품·에너지·선박·조선 거래 및 이란 중앙은행과의 거래 등에 대한 제재다.
북한과 이란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 왜 다를까
사실, 북한 핵이 이란 핵보다 객관적으로 더 위협적이지만, 미국은 북한보다는 이란을 더 압박하고 있다. 상황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은 북한보다 이란이 더 큰 압력에 노출돼 있다.
미국은 중동 핵문제에 대해서는 유독 민감하다. 이스라엘 핵무기는 묵인해줬지만, 여타 중동 국가의 핵무장에 대해서는 타협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중동과 인접한 리비아에 대해서도 그랬다. 2003년 12월, 리비아로부터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을 받아내고 제반 장비들을 수거해 가기까지 했다.
중국 핵무기는 국제적으로 공인까지 해주고 인도·파키스탄 핵무기는 사실상 묵인해주고 북한과는 정상회담을 자주 열려고 하면서도, 이스라엘을 제외한 중동 국가들의 핵개발에 대해서만큼은 사생결단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이란은 북한보다 좀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대외무역에 별로 의존하지 않는 북한에 비해, 석유무역 비중이 높은 이란으로서는 미국의 경제제재가 훨씬 더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만약 미국이 이란 핵문제에 과도한 열정을 쏟지 않고 오로지 북한 핵문제에만 올인한다면, 북한이 지금보다 훨씬 힘든 상황을 겪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미국이 이란 쪽에 힘을 소비하는 결과로, 북한이 여유를 누리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이란에 미안해 할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을 놓고 보면, 북한은 다른 쪽에 감사할 법하다. 그 다른 쪽은 바로 '유대민족'이다.
광해군 폐위 3년 전인 1620년, 영국인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상륙했다. 그 후 앵글로색슨족은 서쪽을 향해 총탄을 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이 일은 서쪽 '미개지대'를 향해 인디언들을 밀어내면서 동쪽 문명지대를 확장시키는 일이었다.
'미국적인 것'의 토대를 제공한 프런티어 가설
앵글로색슨족은 미개지대와 문명지대의 중간 영역을 프런티어(frontier)로 불렀다. 경계 지역인 프런티어에 거주하는 그들은 인디언들을 밀어내며 프런티어 위치를 서쪽으로 이동시켜 나아갔다.
이렇게 프런티어의 서진(西進)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미국적인 것', 이를테면 민주주의·개인주의·평등주의·실용주의·물질주의 등이 창출됐다는 게 미국 역사학자 프레더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 1861~1932)가 1893년에 발표한 '프런티어 가설'이다.
미국 재무부는 1890년 국세조사 보고서를 근거로 '미국에는 더 이상 프런티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갑신정변 2년 뒤인 1886년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뒤의 자신감이 묻어나는 발표였다. 이처럼 미국 땅 안에 더 이상 프런티어가 없게 된 상황에서, 32세 된 청년 역사학자 프레더릭 터너가 프런티어 가설을 발표했고 이것은 미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미국 땅에 더 이상 프런티어가 없는 상황에서 '프런티어 안에서만 미국적인 것이 창출된다'는 발표는, 미국 지배층이 새로운 데로 눈을 돌리도록 만드는 자극제가 됐다. 영국인 역사 저술가인 폴 비드 존슨(Paul Bede Johnson, 1928~)이 1997년 발표한 <미국 국민의 역사>(A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제5부에 이런 대목이 있다. 프레더릭 터너의 발표가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에 관한 설명이다.
"그는 이동하는 프런티어의 존재를 미국 전체의 사회적·경제적 문제의 용해제로 제시했으며 (중략) 이 중대한 보고서는 미국 역사가들이 새로운 시각을 갖고 미국 역사의 전 측면을 밀접히 분석하는 동시에, 미합중국을 독특하게 만드는 게 정확히 뭔지를 찾고자 노력하도록 자극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프런티어를 이동시키며 끊임없이 서진할 때만 미국적인 것이 유지된다'는 터너의 은근한 메시지는 미국 역사학계를 움직이고 미국 지배층을 움직였다. 그의 발표는, 미국 정부가 프런티어 확장을 위한 서진(西進)을 캘리포니아 너머 태평양 쪽으로 확대하는 데 명분을 제공했다. 미국이 1898년에 하와이·필리핀을 강점하고 1899년에 사모아섬·웨이크섬을 강점하는 방법으로 태평양 지배권 확보에 나서는 데 정신적 원동력이 됐다.
그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서태평양에 대한 권리를 나눠갖고자 1905년 7월 일본과 체결한 동맹이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이 밀약은 일본이 그해 11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밀어붙이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제공했다.
그후 미국의 서진은 태평양 지역에 집중됐다. 제1차 세계대전 초·중반 때 미국이 참전하지 않은 것은 '아메리카대륙과 유럽의 상호 불간섭'을 표방한 1823년 먼로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쪽 유럽이 아닌 서쪽 태평양 쪽에서 '미국적인 것'을 찾고자 하는 앵글로색슨족의 분위기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제1차 대전 막판인 1917년 4월 방어적 차원에서 동쪽 독일과의 전쟁에 나섰던 미국은 종전 후에는 다시 태평양 전략에 집중했다. 1921년에 영국·프랑스·일본과의 워싱턴회의를 통해 미국이 태평양에서의 우위권을 확립한 사실, 1941년에 진주만 기습에 맞서 일본과 태평양 전쟁을 벌인 사실은 서쪽을 향한 미국인들의 열망을 반영하는 일들이었다. 미국이 최초로 핵무기를 투하한 두 도시도 태평양 서부에 있다는 사실은 서방 진출에 대한 열망과 무관치 않다.
1945년 제2차 대전 종결 후에도 이 추세가 쭉 이어졌다면,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의 핵무장도 훨씬 힘든 조건에서 진행됐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영향력만이라도 팽창하려는 욕구로 인해, 미국의 역량이 동아시아에 집중됐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다.
중동에 눈 돌린 미국... '유대권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런티어 가설에 어긋나는 현상이 제2차 대전 종전 얼마 뒤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화력(火力)을 중동에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동아시아를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미국은 서쪽이라 할 수도 없고 동쪽이라 할 수도 없는 중동에 열정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물론 제2차 대전 후에도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 전쟁들은 미국이 직접 일으킨 전쟁들이 아니었다. 1945년 이후로 미국은 이 지역에 대해 다소 수동적인 입장을 취했다. 반면에 중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능동적 입장이 됐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미국은 이 지역 전쟁에 적극 참여했고, 가끔은 전쟁을 직접 일으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전력이 크게 분산된 덕분에, 중국 핵무장이 국제적으로 공인되고 인도·파키스탄 핵무장이 사실상 용인될 수 있었다. 북한 역시 미국의 전면적 침공을 받지 않는 가운데, 되레 미국을 압박할 수 있었다. 제2차 대전 이후로 미국이 프런티어 가설에서 상당 정도 이탈한 게 북한한테 득이 된 것이다.
미국이 프런티어 가설에 상당 정도 이탈하게 된 결정적 계기 중 하나는 유대민족의 미국 정착이다. 유대인들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이민을 본격화하고 이곳에서 거대한 경제력을 축적했다. 제1차 대전 이후 20여 년 동안에는 유대인 지식인 15만 명이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 권력을 조성하는 기초가 됐다. 유대인들이 지배층 일원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 지배층은, 눈에 잘 띄는 다수의 앵글로색슨족 지배층과 눈에 잘 안 띄는 소수의 유대인 지배층으로 양분됐다. 숫자가 적은 유대인들은 자기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거대한 금력을 갖고 있기에 앵글로색슨족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다.
이런 구도는 유대인 지배층이 미국 대외정책을 상당부분 좌지우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어떤 측면에서는 혼선이라고도 볼 만한 현상이 계속 빚어졌다. 앵글로색슨족 지배층은 서쪽 동아시아에 화력을 집중하고 싶어 하지만, 유대인 지배층의 개입으로 인해 미국의 전략적 중심은 중동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1948년 5월 14일, 유대국가건국위원회가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정식 정부가 아닌데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불과 11분 만에 이 위원회의 이스라엘 통치를 승인했다. 유대인 문제가 중동 국가들뿐 아니라 유럽 국가들한테도 꽤 복잡한 문제였는데,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신속히 이스라엘 편을 들어준 것이다.
이때부터 유대인의 문제는 곧 미국의 문제가 됐다. 미국은 중동 문제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2중대인지 미국이 이스라엘의 2중대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김봉중의 <탈식민주의 프리즘과 반공주의 렌즈-전후 미국 중동정책의 이상과 현실, 1945~1960>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유대국가 건설 지지)에서부터 시작된 유대인 국가 건설 문제는 30여 년간 아랍 지역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의 복잡한 문제였다. 2차 대전의 종결과 함께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장악한 미국 역시 이 문제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 내 유대인의 영향력에 따라 이 문제는 (미국) 국내정치에서 무시 못할 사안으로 부각되었다." - 2012년 한국서양사학회가 발행한 <서양사론> 제113권에 실린 논문.
제2차 대전 이후로 미국은 중동 문제에서 무조건 이스라엘을 편들고 있다. 핵문제에서 특히 그렇다. 미국이 중동 국가들의 핵무장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미국의 국익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유대민족과 이스라엘의 이익 때문인 측면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거래의 기술>에 언급된 것처럼 '이란이 이스라엘을 위협하므로 이란을 신뢰할 수 없다'고 트럼프가 말하는 것도 그 같은 미국 지배층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미국이 앵글로색슨족 지배층보다는 유대인 지배층의 의중에 따라 더 많이 움직이고 이로 인해 미국의 화력이 동아시아보다 중동에 좀더 집중되다 보니, 북한은 이란보다 보다 나은 환경에서 핵문제를 풀어나갈 가능성을 갖게 됐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이란에게 미안함을 느낄 필요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대민족에게 감사함을 느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