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영웅인 더글라스 맥아더(1880~1964)는 미국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 태평양에서 일본을 물리친 그의 전공은, 유럽에서 독일을 물리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에 밀리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제2차 대전 때 전쟁영웅으로 떠올랐지만, 맥아더는 이미 제1차 대전 때 명성을 얻었다. 또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참모 출신이었다. 1930년대에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에 이어 필리핀 군사고문을 지낼 때, 아이젠하워가 보좌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맥아더는 전쟁영웅 가문 출신이었다. 할아버지인 아서 맥아더는 남북전쟁에서 전공을 세웠고,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 2세는 미국·스페인 전쟁(미서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최근 종영된 <미스터션샤인> 속의 유진 초이(이병헌)는 미서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뒤 조선에 파견됐다. 맥아더의 아버지는 바로 이 전쟁에서 공을 세운 뒤 필리핀 군정장관을 역임했다.
제1차 대전 때부터 전공을 세우고 아이젠하워의 상관을 지낸 데다가 집안마저 군인 명문가였으므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맥아더 쪽이 좀더 높았다. 이 점은 1945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증명됐다. 제2차 대전에 참가한 미국의 전쟁 영웅들 중에서 누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가를 묻는 조사였다. 조사 결과가 태평양전쟁 전문가인 리처드 프랭크(Richard Frank)가 쓴 <맥아더>에 소개돼 있다.
"맥아더는 응답자 중 43퍼센트의 선택을 받아서 다른 모든 사람을 한참 앞섰다. 아이젠하워(31퍼센트)와 패튼(17퍼센트)이 맥아더의 뒤를 따랐다."
이 정도로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맥아더 본인도 자신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64세 때 치러진 1944년 대통령선거의 공화당 경선에서 그의 야심이 살짝 드러났다. 그 자신은 정치에 욕심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측근들을 중심으로 맥아더 클럽이 결성되고 이 단체가 맥아더 띄우기에 나섰으니,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자신은 "나는 후보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공화당 경선 후보로 등록돼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중도하차했다. 공개 성명을 통해 그렇게 했다. 그가 그런 것은 대통령이 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경선 도중에 공개된 두 통의 편지 때문이다. 미국 역사저술가인 조셉 커민스(Joseph Cummins)가 쓴 <미국 대통령선거 이야기>에 편지 내용이 소개돼 있다.
"장군이 네브라스카 출신 하원의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군 최고 사령관인 대통령을 비난한 사실이 밝혀지자 맥아더 카드는 폐기되었다(뿐만 아니라 맥아더가 싱가포르의 여성 합창단원에게 보낸 편지도 공개되었는데, 이 여성은 맥아더를 '아빠'로 지칭했다)."
장군 신분인데도 군 통수권자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민주당 출신)를 비난했다는 점, 혼외관계를 추정케 할 만한 행적을 남겼다는 점 등으로 인해 공화당 지도부가 맥아더 카드를 접은 뒤에, 맥아더 본인이 "나는 그 직책에 대한 후보가 아니었다"고 언명했던 것이다.
1944년 대선에서는 토마스 듀이가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고, 민주당 후보인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편지들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맥아더가 공화당 후보가 됐거나 대통령이 됐을 수도 있었다. 이처럼 전쟁 중에도 대통령 꿈을 품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지지자들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가 좀 많기는 했지만 향후 대선에 도전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었다.
중공군에게 밀리면서도 전쟁 확대... '악수'를 던지다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을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땅이 있다. 바로 한국 땅이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그는 초반에는 과거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9월 15일, 김일성의 허를 찌르는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 추세대로 전쟁이 끝났다면, 맥아더는 대권의 꿈에 훨씬 가까이 다가갔을 것이다. 하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상황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중공군이 참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맥아더의 미군이 중공군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이 뒤틀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카드가 맥아더한테서 나왔다. 중공군 참전 다음 달인 1950년 11월 7일이었다. 이날, '만주를 폭격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맥아더의 요청이 합동참모본부에 전달됐다. 중공군에 밀리면서도 전쟁 확대를 꾀하는 맥아더의 발상이 그렇게 공식화됐던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은 서서히 소극적인 입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자칫하면 소련까지 참전하게 되고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달랐다. 대만(타이완)의 국민당 군대를 끌어들여서라도 끝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11월 28일에는 국민당 군대를 참전시켜달라고 워싱턴에 요청하기까지 했다.
맥아더의 구상은 단순히 만주를 폭격하고 대만을 끌어들이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전날인 12월 24일에는 북한·만주·연해주에 대한 원자폭탄 폭격까지 워싱턴에 요청했다. 한 달 전인 11월 24일, 그는 한국에 주둔 중인 자국 병사들에게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랬던 그가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전날, 핵전쟁으로의 확전을 요구했던 것이다.
트루먼은 휴전 쪽으로 점점 기울었지만, 맥아더는 신경쓰지 않았다. 대통령의 의사와 상반되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휴전을 모색하는 대통령을 불쾌하게 할 외신 인터뷰까지 감행했다. 1951년 1월 29일 <런던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의 자유를 위한 전투는 계속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대통령에 대한 우회적인 항명이었던 것이다.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미국은 그렇게 했다.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도 불명예스럽고 맥아더 본인한테도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이 패전한 것은 아니지만, 맥아더는 중공군한테 밀리는 상황에서 '강판'당했다. 엄밀히 말하면 패장은 아니지만, 패장 가까이 갔던 것은 사실이다.
맥아더에게 한국전쟁이란?
그동안 한국에서는 보수세력의 선전에 힘입어 '맥아더=인천상륙작전'이란 공식이 존재했다. 이 공식은 한국에서 '명장 맥아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맥아더와 한국전쟁의 관계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가 중공군을 이기지 못했다는 점, 한국 땅에서 핵전쟁을 벌이려다 실패했다는 점, 적전(敵前) 불명예 퇴진을 당했다는 점 등이다. '공'보다 '과'가 더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 중에 교체됐던 것이다. 그는 이 전쟁의 명장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심하게 표현하면 패장 가까이 갔던 사람이다.
한국에서 입은 불명예로 그의 대권 꿈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국전쟁 후에도 그는 민간 기업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공식 활동을 할 만한 건강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불명예만 입지 않았다면, 재계가 아니라 정계에서 활동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맥아더한테 '무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45년 9월 7일, 맥아더는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는 유명한 포고문을 발표했다. 한국을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점령한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불과 6년 만에 한반도에서 자신의 명예를 '점령'당했다. 그와 함께 정치적 꿈도 상실하고 말았다.
해임 직후인 1951년 4월 19일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 출석한 맥아더는 37분간의 연설 끝 대목에서 명언 한마디를 남겼다. 그가 입대했을 당시 유행했던 군가의 한 구절을 인용한 말이었다.
"노병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사라질 뿐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1945년에 자신이 점령을 선포했던 그 땅에서 명장의 이미지를 잃고 패장에 가까운 상태로 짐을 싸야 했다. 군인의 명예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는 한국에서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채, 한국 보수세력 중에는 여전히 맥아더를 숭배하는 이들이 있다. 무속인들 중에도 있다. 민속문제 전문가인 고 서정범 교수의 <한국 무속인 열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가 방문한 어느 소녀 무속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어머니가 맥아더 장군의 신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내림굿을 받은 소녀도 맥아더 장군을 모시고 있다."
일부 무속인들이 맥아더를 몸주로 모시는 것은 그가 영험한 능력을 가졌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과오들을 저지르고 불명예 퇴진을 당했다. 북한군의 허는 찔렀지만 중공군한테는 당했다.
제2차 대전 영웅을 그렇게 추락시킨 생각의 씨앗들이 1950년 11월에 커져가고 있었다. 이기기 힘든 적을 상대로 도리어 확전을 꾀하는 그의 생각은 11월 7일의 건의로 구체화됐다. 맥아더의 실패를 예고하는 징후들이 68년 전의 쓸쓸한 가을에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