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은 종일 '너 꽃뱀이지 사건'들로 바빴다. 사건들을 하다보면 나름대로 제목을 달아보고 분류도 하게 된다. '너 꽃뱀이지 사건'은 성폭력 가해자들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부터 피해자를 향해 '너 돈 달라는 거지'라는 비난을 하며 고소를 못하게 간접적으로 종용하기 시작해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까지 그런 주장을 하는 사건들에 붙인 이름이다.
오전엔 재판이었다. 지도학생이자 자기 밑에서 일하는 학생을 출장이랍시고 데리고 갔다가 심하게 추행한 사건이다. 작년 봄에 고소해 기소가 됐고, 형사재판 1심부터 3심까지 거쳐 유죄와 실형이 확정됐다.
그런데 조사부터 재판까지, 예순을 바라보는 유부남 교수는 자기 반평생쯤 산 제자를 두고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를 유혹했다' 등을 계속 주장했다.
피해자는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 교수도 알고 있었다. 피해자와 교수가 업무문제로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들에는 피해자의 예의바른 업무보고와 인사말 외엔 흔한 이모티콘 하나 없었다.
염색하고, 술마실 때 웃으면 꽃뱀?
형사 재판에는 교수 친구까지 증인으로 나왔다. '피해자가 야해 보였다' 등 그가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을 이어가서 판사가 '증인이 그런 말을 하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을 지경이었다. 당황한 교수 친구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피해자가 긴 머리에 노란 염색을 하고, 회식 때 술을 마시며 웃어서, 추행 다음날 얘기를 듣고 술 마시고 남녀 간에 생긴 문제라 생각했단다.
피해자는 빠듯한 형편에도 가해자의 이런 행각에 법률조력을 받아야겠다고 결정했다. 지방사건이고 국선변호사건 정도의 비용을 받아야 했지만 재판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항소심에서 피해자 최후 변론을 하는 날, 구속 중이라 수의를 입고 피고인석에 앉은 교수가 하도 노려봐서 피해자 얼굴이 뚫어질까 걱정될 정도였다.
어제는 이 사건의 민사 1심 변론종결일이었다. 가해자는 돈이 없다면서도 변호사는 계속 선임하고, 추행과정에서 학생이 빌미를 줬으니 참작해달라는 둥 결국 피해자에게 '너 꽃뱀이지' 하다가 법원에 '얘 꽃뱀이니 봐달라'고 하는 사건으로 마무리됐다.
이 재판을 마치고 부랴부랴 서울로 돌아와 조사에 배석했다. 또 다른 '너 꽃뱀이지' 사건인데, 이제 막 고소를 시작해 피해자 조사가 진행 중인 사례다.
피해자는 근무지에 손님으로 와 그저 안면만 있을 뿐이던 가해자에게 준강간을 당했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집에서 정신을 차린 후 가해자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 허겁지겁 나와 귀가했지만, 가해자 연락처나 신원을 몰라 신고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연락을 했다. 피해자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물으며 따졌다. 그때부터 가해자는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아붙이며 '신고하면 무고'라고 거품을 물었다. 또 피해자에게 '촬영물을 가지고 있다'며 만나자고 종용하고, 그가 신고를 못하도록 위협했다(요즘에는 이런 유형의 사건이 많아 이번주도 유사한 사건 고소를 진행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밑도 끝도 없이 '너 꽃뱀이지'를 시전하는 녹취록을 듣는 건 고통스러웠다. 두 사람이 통화를 한 어느 날, 녹음파일 속 내 의뢰인은 잔뜩 겁에 질려 '무슨 사진인지 몰라도 보내달라, 삭제해달라'고 가해자에게 애처롭게 부탁하고 있었다.
이 사건을 고소하고 조사를 받으며 피해자는 위축되어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고소인이 된 피해자가, 그 녹취록을 내놓고 설명하는 일이, 피의자가 아니라 피해자라서 쉬울리는 만무했다. 꼭 기소되게 만들어서 피해자에게 '너 꽃뱀이지' 하는 가해자야말로 뱀이라고 법정에서 말할 테다. 피해자 조사를 노트북 컴퓨터로 정리하면서, 그렇게 메모했다.
경찰서는 집에서 가까웠지만, 서면이 밀려 오후 7시 즈음 서초동 사무실로 복귀했다. 가해자가 강간을 시도하다 피해자의 가슴을 누르는 과정에서 피해자 가슴뼈에 금이 갔는데 가해자가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피해자는 벽에 부딪히는 과정에서 다쳤을 수도 있다며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이 나온 사건이 있다. 이후 가해자는 피해자를 무고로 고소했지만, 역시 불기소됐다. 그러자 가해자는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해왔다.
민사 소장을 받은 피해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몇 시간이나 떨어진 서울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기록을 보니 뭐 이렇게 나쁜 사람이 있나 싶어 사건을 맡고 반소를 제기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 간에 오고간 고소사건 수사기록을 촉탁했다. 약 2천 쪽에 달하는 기록이 이번주 월요일(5일)에야 전자소송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오늘(8일)이 재판이라 어젯밤 무리해서 기록을 꾸역꾸역 보는데, 가해자가 중요한 문서를 변조해 제출한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방어가 목표였다. 하지만 이제는 가해자를 고소하고 민사소송을 이길 수 있을 공격의 문이 열렸다. 멈출 수가 없어서 오전 1시까지 서면을 써 전자소송 홈페이지에 올렸다. 어쩌면 강간치상사건을 다시 수사하란 요구를 할 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고선 가해자가 '방어권'이란 명목으로 피해자를 향해 쏟아놓은 '너 꽃뱀이지'가 창궐한 각종 진술서, 신문조서 등을 읽는데... 숙취보다 더한 멀미가 났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새벽 귀갓길, 말이 말이 아닌 기록더미에서 헤어 나와 강남역까지 걸었다.
말이 말이 아닌 사람들
꽃뱀이란 단어 자체에 대한 평가나 그런 의미의 사람들이 존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에겐 욕망의 실현이었던 일이 타인에겐 치명적 상처라는 소리를 접했을 때, 정말 억울하다면 '내가 겪고 아는 일과 다르다'는 설명으로도 족하다. 정말 억울하다며 타인에게 '너 꽃뱀이지' 운운하는 것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온당해 보이지도 않다.
법은 피해자에게 녹록치 않은 두껍고 높은 벽처럼 보이지만, 이런 가해자들에겐 결국 더 묵직하고 단단한 벽으로 선다. 늘 쉽지 않고, 낙관할 수 없으나 그래도 사필귀정을 믿는다. 언젠가는 '너 꽃뱀이지' 사건들이 좀 줄어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