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
요즘 들어서 많이 느끼는 감정이 있다. 바로 심심함이다. 종종 '정말 심심해죽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럴 때마다 놀라는 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심하다는 느낌은 내 사전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렇듯이 나도 20,30대 때는 주변에 늘 사람이 많았다. 내가 연락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연휴나 주말, 내 생일은 '주간'이라 부를 정도로 연예인처럼 스케줄을 짜서 만나기도 했다.
당연히 심심할 틈도 없었거니와 나름 내향이어서 혼자 있는 시간도 편안하게 즐기며 에너지를 충전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소위 '혼자 잘 지내는 사람이 함께도 잘 지낸다'는 말을 잘 실행하고 있는, 꽤 괜찮은 사람인 줄만 알았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참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 변화는 주로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나, 관계, 쌓아온 것들, 당연하게 여긴 것들에 대한 균열을 통해 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흔들린다.
심심함을 부쩍 많이 느끼는 요즘에도 그렇다. 결혼을 한 친구들로부터 "너는 혼자도 꽤 잘 지내는 것 같아"라고 공식 인정을 받았을 정도고 자타공인 '나 혼자 잘 산다'를 무난하게 실현하는 사람이었던 내가, 점점 둑이 터지듯 밀려오는 심심함 앞에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
젊을 때처럼 촘촘하게 일할 수 없게 되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기기도 했거니와, 나이가 들면서 여러 이유로 관계망이 좁아졌다는 것도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아무리 혼자 잘 논다 해도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압권은 생일날이다. 생일날 아침이면 문자 메시지가 들이닥친다. 반가운 마음에 확인해 보면 첫 문장에서 김이 빠져버린다. 생일에 오는 문자의 80%가 "고객님" "회원님"으로 시작하는 스팸성 축하 문자다. 대부분 치과, 내과, 회원 가입한 쇼핑몰 사이트에서 날아온 생일 축하 메시지들.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낸 사람들 중에 "오늘 뭐해?"라든가 "같이 저녁 먹을까?"라고 묻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좋은 사람과 행복한 시간 보내"라는 영혼 없는 메시지가 다였다. 이쯤 되면 마음에 '섭섭이'가 들어앉는다.
'그 좋은 사람이 너면 왜 안 되는 걸까?'
없어 보일까봐 혹은 자존심 상해서 투정은 마음속으로만 할 뿐, 그저 다들 바쁘니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서운함을 꿀꺽 삼켜버린다. 한편으로는 '내가 잘못 살았나?' 싶기도 하고, '더 나이 들어서 지금보다 더 많이 쓸쓸해지고 외로워지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결혼한 친구, 아이 낳은 친구들은 가정이 우선이니 내가 심심하다고 아무 때나 연락할 수도 없는 처지. 나름의 배려와 지레짐작으로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을 때가 많아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언제부터였을까. 함께 친했던 친구들이 결혼하더니 부부 동반으로 만나거나 여행을 간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때가 있었다. 머리로는 싱글인 나에게 함께 가자고 청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조금은 아쉬워도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런 당연함들이 이자처럼 쌓이면서 가끔은 '이게 최선입니까?'라고 누구에게든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렇듯 사소한 서운함이 틈을 만들어서 멀어져버린 관계는 또 얼마나 많은가. 한 때 너무나 친해서 평생 지란지교를 꿈꾸었지만 지금은 소식조차 끊긴 친구들. 연락은 할 수 있지만 그간의 세월의 벽을 넘을 수 없어 굳이 연락하게 되지 않는 친구들. 잠깐의 서운함과 오해를 풀지 못해 멀어지는 걸 허용한 친구들. 돌아보니 많은 얼굴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나도 어느 사이엔가 친구들의 생일을 챙기지 못했던 것 같다. 가족들이 챙겨주겠지 하면서. 내 감정이 복잡할 땐 친구의 아이들이 따라붙는 게 불편해서 연락을 하지 않았고, 함께 놀러가자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 쪽에서도 어쩔 수 없이, 또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선을 그었을 수도 있지만, 내 쪽에서 지레 선을 긋기도 했다.
결혼하고 출산한 친구가 양육을 하는 동안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옆에 머물러주기보다 점점 공감대가 사라지는 것에 서운해서 멀어지는 틈을 허용한 건 나다. 그러니 이렇게 된 건 내 쪽에도 절반의 책임이 있는 셈이다.
영원한 관계는 없고, 사람은 썰물처럼 흘러가는가 하면 밀물처럼 들어오기도 한다. 혼자도 잘 지내고 혼자 있는 시간도 좋아한다. 어쩔 수 없이 멀어지는 관계에 대해서는 초연해진다. 때로는 내 쪽에서 먼저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거리를 두며 관계를 정리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나이 들수록 관계망이 좁아지고, 어느 사이엔가 내가 익숙하고 편안한 관계에 머무르기도 한다. 그런 게 나쁜 것만은 아니리라. 하지만 어느새 관계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고 느닷없이 찾아온 심심함의 느낌은 어쩐지 조금 따끔하다.
'괴팍하게 돼서 내 옆에 아무도 없으면 어쩌지?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면 어쩌지?'
40,50대가 겪는 감정의 변화 중 하나가 덜컥 홀로 남겨진다는 두려움이라고 한다. 격하게 공감. 그래서 건강한 생존을 위해 단단한 관계망과 심심하지 않을 방법이 필요하다.
노인이 많은 오키나와에서는 아침마다 서로의 창문을 두드려주는 게 인사라고 했더니, 싱글 여성들 모임에서 우리는 나중에 아침마다 안부 카톡이라도 하자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웃으면서 들었지만, 그것도 하나의 대안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꼭 싱글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놀고 서로를 살필 수 있는 핑계거리들을 생의 요소요소에 마련해 놓는 건 누구에게든 필요한 장치일 테니.
그래서인지 요즘은 내 곁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삼스럽게 고맙다. 더할 수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위기 속에서 신뢰의 관계를 깨지 않고 지금까지 왔고, 미래도 기꺼이 함께해줄 선하고 묵묵한 인간들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난 그들에게 젖은 낙엽처럼 꼭 붙어 있을 작정이다. 그리고 이제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성실하고 싶다.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손이 닿는 다정한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