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예능 프로그램 <같이 걸을까>는 그룹 god 멤버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프로그램이다. 이렇게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룰 정도로 최근 많은 이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산티아고 순례길을 둘러싼 논란도 늘어나는 분위기다. 최근 한 매체는 한국인 단체여행객 수십 명이 순례자 숙소에서 삼겹살을 굽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 외국인들의 원성을 산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무슨 일이?
최근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A씨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A씨는 순례길의 공용숙소인 알베르게에서 한국인 단체 순례자들을 만났다. 한 종교단체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순례자들이 냄비에 저녁밥을 지어놓고는 바닥에 눌어붙은 밥을 그대로 두었다. 다음 날 아침 누룽지를 해먹겠다는 이유였다. 결국 같은 알베르게의 다른 순례자들은 그 냄비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올 가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B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여행사를 통해 단체로 온 한국 순례자들이 알베르게 부엌에서 부침개를 수십 장 구워 함께 순례하는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한국 사람들이 부엌과 공용공간을 점령하고 부침개를 굽는 바람에 다른 순례자들은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난해에 다녀온 C씨의 경우 한국 등산회에서 온 순례객들과 마주쳤다. 이들은 길을 걸으며 한국에서 등산할 때처럼 소주와 막걸리를 마셨다고 한다. 심지어 막걸리를 마신 뒤 병을 아무 데나 버렸는데, 길을 걸으면서 이들이 지나갔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산티아고 순례길은 다른 관광지와는 다른 특성이 있다. 순례자들은 기본적으로 하루 20~30km를 걷고 알베르게라고 불리는 순례자 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한다. 알베르게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100명 이상이 한 건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에티켓이 필수인 이유다.
그러나 앞서 든 사례처럼 한국인 순례객들을 둘러싼 구설이 최근 들어 자주 들려온다. 순례 여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에티켓조차 안 지킨다는 지적이다. 특히 각 종교단체나 등산회, 여행사에서 진행하는 단체순례가 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증가하는 추세다. 먼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여행자로서 정리해봤다. 순례길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 세 가지.
① 순례길에서 한식대첩... 이제는 자중해야
알베르게에서는 많은 순례자들이 부엌과 욕실, 세탁공간, 거실 등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늘 다른 상대를 헤아리며 공용공간을 사용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한국 순례객들이 주로 독차지하는 공용 공간은 바로 부엌이다. 한식을 먹어야 힘이 생긴다는 사람도 있고, 또 모처럼 요리솜씨를 발휘해 다른 순례자들을 대접하려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냄비 하나만 있으면 되는 파스타와 달리, 한국 요리는 차려야 하는 가짓수가 많다는 것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밥이 있어야 하고, 또 밥만 먹을 수 없으니 국과 반찬이 필요한데, 그러면 가스 불을 세 개나 네 개씩 차지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요리를 했으면 요리에 사용한 도구들을 빨리 씻어 다른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가뜩이나 밥을 하느라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 다음날 누룽지를 먹겠다고 그 냄비를 그대로 두면 그때까지 다른 순례자들이 쓸 수 없다. 일부 순례자들은 밥이 눌어붙은 냄비를 씻지 않고 그냥 두고 가기도 해서 일부 알베르게는 한국인이 오면 미리 주의를 주기도 한다고.
그리고 단체로 온 한국 순례객들은 대규모로 요리를 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언급한 삼겹살이나 부침개처럼 한번 요리를 하면 요란벅적하게 부엌을 점령하고 몇 십 인분의 요리를 하는 것이다. 물론 함께 순례하는 사람들이 다 가족 같고, 아들, 딸 같아서 좋은 마음으로 챙기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이렇게 대량으로 요리를 하는 경우 다른 순례자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제안 : 긴 순례길의 여정에서 요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요리를 하되 가짓수를 줄여 가능한 한 간단하게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순례길에 한식대첩 벌이러 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중장년층의 여성 순례자들은 이 알베르게의 모든 한국인 순례자들을 다 거두어 먹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공용 공간을 쓰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배려하는 매너가 필요하다.
② 배려와 눈치보는 것의 차이
산티아고 순례길은 하루 20~30km를 걷는 여정이다. 그러다 보니 숙소에서 피로를 확실하게 푸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알베르게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여러 명이 한방에서 잠을 자는 도미토리다. 적게는 4명부터 많게는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공간을 사용한다. 취침시간에는 더욱 조심해서 행동해야 한다.
일부 한국 순례객들은 숙소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그러다 보니 목소리가 자꾸만 커진다. 다른 순례자들이 아무리 조용히 해달라고 당부해도 소용없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자신들은 남을 배려해 목소리를 줄인다고 줄이지만 여전히 큰 경향이 있다.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하면 꼭 듣는 말이 있다. '시끄러운 건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인데 왜 우리만 남의 눈치를 봐야 하나?' 물론 외국인들도 시끄러운 경우가 있다. 하지만 마치 어느 국가가 가장 추한지 경쟁이라도 하듯 외국인이 떠든다고 한국인들도 함께 떠들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밤 10시가 지나면 조용히 하는 것은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려는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유럽에 머물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 있는 경제력과 여유를 가졌으면서, 아직도 눈치와 배려의 차이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제안 : 일단 밤 10시부터 새벽 6시 사이에는 무조건 조용히 해야 한다. 특히 밤이나 새벽은 목소리가 울린다. 이 시간대에는 가능한 말을 하지 않도록 하자. 피곤한 다른 순례자와 또 잠들어 있을 현지주민을 위해서다. 스스로는 작게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들 입장에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 부득이하게 밤늦게 짐을 풀거나 새벽에 짐을 싸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방에서 부스럭거릴 것이 아니라, 짐을 그대로 들고 공용 공간으로 나가서 정리하도록 하자.
③ 낙서에도 T.P.O가 있다
길을 걷다 보면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써놓은 낙서를 발견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여행지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순례길 위의 낙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측면이 있다. 주로 이정표나, 카페 벽, 마을 입구 등에 많다. 아름다운 시가 적혀 있기도 하고 길을 걷는 서로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적혀 있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산티아고 순례길에 낙서가 많더라도, 여기에도 지켜야 할 장소와 상황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곳곳에 십자가가 서 있다. 교구나 개인이 신앙심의 발로로 세워두거나, 그곳을 지나다 사망한 순례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두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하루는 이런 십자가에 한국어 낙서가 적혀 있는 경우를 봤다. 그 십자가에는 "세월호와 강정마을 밀양송전탑을 생각하며..."라고 적혀 있었다. 세월호와 강정마을과 밀양송전탑을 생각하는 건 좋은데,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이 세운 십자가 위에 흔적을 남겼을까.
또 루고 지방의 포르토마린에는 마을 입구에 유서 깊은 아치형 돌계단이 있다. 로마 시절 세워졌던 다리의 일부분이다. 그 가파른 계단을 다 올랐을 때 또 다시 한국어 낙서를 발견했다. 그곳에 유일하게 적혀 있던 낙서였다. 순례길을 걷는 부모님이 뒤따라오는 자녀에게 보내는 응원 문구였다. 아마 '여기에는 다른 낙서가 없어 눈에 잘 띄겠지'라는 심정으로 썼겠지만, 남들이 그곳에 낙서를 안 한다면 왜 낙서를 안 하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제안 : 최고의 여행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여행이다. 그럼에도 꼭 남겨야 한다면, 이곳이 낙서를 남겨도 되는 공간인지 다시 생각해 보자. 산티아고 순례길은 단순한 트레킹 루트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는 길이기도 하고, 현지 주민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산티아고에 나타난 동양인들, 한국인
8세기 한 수도사가 야고보(산티아고)의 유해를 발견한 후, 이 길은 종교적 의미를 지닌 순례길이 됐다. 그리고 최근에는 현대인들에게 종교를 넘어 힐링과 자아 성찰의 길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천년이 넘는 순례길의 역사에서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현재도 산티아고 순례길의 주류는 대부분 유럽 국가나 미국 등에서 온 순례객들이다. 한 달 이상의 시간과 그만큼의 체류비를 여행에 투자할 수 있을 만큼 여유를 갖춘 국가들인 것이다.
그런데 새천년에 들어 이곳에 새로운 집단이 나타났다. 바로 한국인이다. 2005년 한국 순례자의 수는 14명, 그러나 2007년에는 이미 일본을 추월한 449명이었고, 2016년에는 4534명이 넘는 한국인이 이 길을 걸었다. 지금 한국인은 순례길을 걷는 다양한 국적 중 9위를 차지하고 있다(출처: http://oficinadelperegrino.com).
현재 산티아고 순례길의 한국인은 백인들 사이의 유일한 동양인 군집이다. 그러다 보니 순례길을 걷다 보면 '왜 이 길에 한국인이 이렇게 많은지?'를 물어보는 다른 나라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다. 사실 유럽권 국가 순례자들에 비하면 많은 것도 아닌데, 동양인이 이렇게 많은 경우는 처음이다 보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순례의 목적 외에도 다양한 국가 사람들과 만나는 문화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길에 한국뿐 아니라 다양한 출신의 순례자가 늘어나는 것은 긍정적인 일로 여겨진다.
사실 한국인 순례자 대부분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는 평을 듣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행을 실천하는 한국인 순례자들도 많다. 단지 위에 언급한 내용처럼 일부 한국인 순례자들이 전체 한국 순례자들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최근 한국인 단체 순례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런 잡음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사실 여기에는 단체 순례를 인솔하는 주최 측의 노력이 필요하다. 단체 순례에는 해외 경험이 없어 혼자 순례길을 걸을 수 없는 중장년층 참가자가 많다. 문제는 젊어서부터 배낭여행을 하며 공동 숙소 경험과 글로벌 에티켓에 익숙해 있는 유럽권 중장년층과 달리, 한국의 중장년층 중에는 그런 국제적 매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최 측에서는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글로벌 에티켓에 대한 확실한 주지와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언급한 누룽지, 부침개, 막걸리처럼 다른 순례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한국 순례자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문제가 반복될 것이다.
나눔과 배려로 이어온 천년의 역사,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Pilgrimage)는 믿음의 행위다. 사람들은 순례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함께 하는 이들과 우정을 나눈다. 사실 지금까지 이 길이 생겨나고 이어져 내려온 배경에는 종교와 정치라는 이해관계가 있었고, 지금은 스페인 정부의 관광육성 정책이 있다. 그러나 그런 배경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신을 찾기 위해,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 혹은 인생의 답을 발견하기 위해 사람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고, 이들은 매일 20~30km를 걷는 육체적 고난을 넘어서며 자기만의 길을 걸어 나간다.
그리고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길이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서려 있는 나눔과 배려의 전통 덕분이기도 하다. 순례자들은 길을 걸으며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의 순례를 돕는다. 길을 걸으면서 마주하는 이런 따뜻한 경험들은 파울료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에 나오는 한 구절처럼 '비범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유명한 트레킹 루트에는 없는 산티아고 순례길만의 매력인 것이다.
한국은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 참가 국가 9위로, 주류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제 글로벌 에티켓도 9위에 준할 정도로 높아져야 하지 않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한국 순례자들이 이 길에 서려 있는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되새기며, 순례라는 경험을 의미 있게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