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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경찰, 소방, 한국전기안전공사 관계자 등 합동조사단이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KT아현국사에서 이틀전 발생한 화재원인 조사를 마치고 현장에서 빠져 나오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경찰, 소방, 한국전기안전공사 관계자 등 합동조사단이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KT아현국사에서 이틀전 발생한 화재원인 조사를 마치고 현장에서 빠져 나오고 있다. ⓒ 이희훈
#. 장면 1
24일 오후, 시각장애인인 은철이는 본인과 같이 시각장애가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복지콜을 타고 신촌 현대백화점에 도착했다. 2시에 만나기로 했지만, 시간이 훨씬 지나도 친구는 오지 않았다. 은철이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이폰의 기능인 시리를 이용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먹통이었다.

두 번, 세 번 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은철이는 비교적 스마트폰을 잘 다루는 편이라 직접 입력 방식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자신의 전화기가 고장 났나 싶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전화를 할 수 있을지 부탁했다. 그러자 행인은 '지금 화재 사고로 통신 장애가 생겨서 전화를 쓸 수 없다'고 말했다. 은철이는 그제서야 통신 장애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활동지원사나 비장애인을 만나기로 했다면 같은 백화점이라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시각장애인끼리였기 때문에 그렇지 못했다. 시각장애인에게 스마트폰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스마트폰의 이용이 불가능할 때 비장애인보다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다. 은철이는 할 수 없이 지나가던 남자 대학생에게 전후 사정을 말하고 고객센터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고객센터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친구를 찾는 안내 방송을 한 이후에야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 장면 2
아현동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시각장애인 지훈이는 난감한 사정이 생겼다. 지훈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집 안에 IoT(사물인터넷) 기기를 설치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훈이 보일러 온도를 올리고 청소기를 음성 인식으로 작동시키려 하자 작동하지 않았다. 외출해야 했지만, 음성인식으로 명령이 되지 않아 난방 장치를 켜놓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에너지가 낭비되고 지훈이의 주머니 사정도 가벼워졌다. 비장애인이라면 간단히 조작해 나갈 수 있겠지만 지훈이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 장면 3
서대문구에 사는 승철이는 와상 장애인이다. 호흡이 가빠져 급히 전화기를 찾았지만, 전화가 되지 않았다. 응급실을 가기 위해 119를 불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활동지원사 또한 부를 수 없었다. 혼자 사는 승철이는 죽음이 눈앞에 현실로 닥쳐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와상 장애인이 아니라면 기어 나오든 걸어 나오든 문 앞으로 나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승철이는 자신이 위험에 빠진 상태를 타인에게 알릴 수 없었다.


위에서 열거한 일들은 가상의 사례다. 하지만 이번 통신 장애로 일어났을 수 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실제 사건이 불거진 이후 어려움을 겪었다는 장애인들의 경험담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이번 KT 아현지사의 화재로 비장애인도 많은 불편이 생겼다. 하지만, 장애인의 경우 생명과 직결되는 위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비장애인은 다른 대안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반면, 시각장애인 등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국가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인에게 특화된 서비스 필요... 이번 사건, 타산지석 삼아야

시각장애인인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렇다. 근본적으로 통신 장애가 생길 때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통신사 간 협력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또 장애인에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와상 장애인에게는 긴급 상황일 때 인근 소방서와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벨을 설치해주어야 한다. 시각장애인에게도 다른 정보 접근 수단을 마련할 수 있도록 고심해야 한다.

이번 KT 아현지사 화재 이후 초기 언론 보도를 보면 통신 장애로 인한 비장애인의 불편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론이 통신 장애로 불편을 겪는 장애인의 사례가 있는지 검토하고, 그 위험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적해야 한다.

또 이와 비슷한 통신 장애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늘의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장애인의 삶과 생명권을 위협하는 통신장애에 대한 대처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KT화재#장애인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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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둠 속에서도 색채있는 삶을 살아온 시각장애인이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점자가 사라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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