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인 큰딸은 지난 여름 방학 동안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다. 미용실에 가서 염색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친구 몇몇이 어울려 인터넷으로 염색약을 구입해 한날 우리 집에 모여 서로의 머리를 각자 원하는 색으로 물들였다.
나와 아내는 샛노랗게 변한 딸의 머리가 어색하고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지만, 머리색만큼이나 환하게 웃으며 "어때 어울려?"고 묻는 딸에게 차마 싫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멋진데. 의외로 잘 어울리네!"
입는 옷 취향이나 머리색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면 당장에 '꼰대'라는 말이 돌아올까 두려워 속에 없는 말로 상찬한 것만은 아니다. 옷이나 머리색 정도는 자기 취향대로 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도 했고, 아무리 부모라도 아이의 취향을 부정하며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혀에 피어싱을 해보고 싶다는 딸의 말에는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려 애썼지만, 출혈과 감염 위험이라는 변변치 못한 이유를 들어 극구 막아야 했다.
'인권 문제'는 쉽게 말해 '우리도 사람 취급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모든 게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피어싱을 해보고 싶다는 딸의 말에 화들짝 놀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막아야 해'라고 생각했던 나는 인권 감수성이 떨어지는 부모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이가 머리를 물들이고 자기 취향대로 옷을 고른다면 그 나이는 언제쯤이어야 할까. 취향과 욕망이 생기는 대로 허용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술이나 담배는 언제부터 허용해야 할까? 섹스나 동성애 취향은 언제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들도 모두 취향과 욕망이 생기는 대로 허용하는 것이 인권일까?
아니면 술과 담배 약물 섹스를 성년이 되기 전까지 금지하는 것이 아이의 인권을 '보호'하는 방법일까? 적어도 대한민국 법률은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타인의 취향과 욕망을 '보호'를 이유로 '금지'하거나 '허용'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있기는 한 걸까?
'인권'은커녕 고성과 폭력만 난무한 현실
인권 문제를 두고 토론회를 연다면 적어도 이러한 논점과 주제를 잡아 치열하게 논쟁하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차마 눈 뜨고 못 보아줄 만큼 참담하고 천박해 부끄러울 지경이다.
지난 20일 창원에서 열린 학생인권조례 공청회장은 조례 제정에 반대하는 단체 회원들이 몰려와 고성과 폭력을 행사해 난장판이 됐다고 한다. 반대론자들은 학생인권조례가 동성애를 조장하고 성을 문란하게 하고, 교권을 침해해 학교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인권조례가 없는 학교는 지금껏 얼마나 정상적이었나? 학생들을 치열한 입시경쟁에 몰아넣고는, 잠을 재우지 않고, 머리 모양, 옷 색깔, 양말 색깔 하나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게 하는 군대식 또는 감옥식 교육으로 그동안 학생들은 또 어른들은 얼마나 만족하고 행복해했나?
어떤 이는 학교에서 개인 소지품을 뺏거나 금지하지 못하게 되면 휴대폰 때문에 학습능력이 떨어질 것이라 걱정한다. 학생들에게 체벌을 금하고, 자기 주장을 허용하고, 학칙에 대해 토론하게 하면, 다시 말해 학교 생활에 대해 학생들이 자기 결정권을 갖게 되면 교사의 권위가 무너지고 학교가 망할 것이라고 한다.
감히 말하건대, 학생에게 인권을 보장한다고 망할 학교라면 진즉에 망해야 한다.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교육이 길러낸 인재가 사람과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인권에 대해 제대로 말하려면 우리는 학교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교육이란 무엇인지, 나아가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말해야 한다.
근대 학교 교육은 값싼 노동력을 시장에 대량 공급하는 도구로서 기능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투자 대비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인간을 계량하고 평가해 자본의 확대 재생산에 충실히 복무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교육은 인간이 자기 신체와 삶의 주인이 되어 세상과 지역사회를 제대로 인식하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게 목표가 돼야 할 것이다.
학생인권조례 하나 제정된다고 당장에 학교가 바뀌고 학생들의 생활이 나아지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교육이 바뀌고 이 사회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21세기의 5분의 1이 지나고 있는 시점에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제시한 보편적인 인권 수준조차 학생들에게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지길 희망하는 것은 영영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딸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애써 물들인 머리를 방학이 끝나기 전에 다시 검정색으로 물들이는 일이 없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단디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