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는 신을 속인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고 올라가는 벌을 받았다. 바위를 정상까지 힘겹게 밀어 올려도 그 즉시 아래로 굴러 내려갔기 때문에 시시포스는 평생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한 잡지에 실린 글이 기억난다. 시시포스의 신화가 그토록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끝없는 노동에 목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시시포스의 삶을 제대로 된 인생이라고 부를 수 없는 까닭은 매일 바위를 굴리는 형벌이 단조로워서가 아니라 그 끝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서다. 그의 삶은 끝없는 반복뿐인데, 그의 노력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게 시시포스 굴레의 비극이다.
처음 육아에 뛰어들었을 때 심정이 그랬다. 시시포스가 매일 바위를 굴리듯 온종일 아기를 위해 먹이고 치우는 일을 반복하는데, 내가 이렇게 하루하루 버티면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 막막했다.
그동안은 비교적 인과가 명확한 삶을 살아왔다. 공부해서 대학 가고, 취업준비 해서 입사하고, 주어진 일 해서 월급 받고, 연애해서 결혼하고. 뿌린 만큼 거두고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게 당연한 이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육아는 그렇지 않다. 노력해도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전개되는 경우도 있다. 날마다 성실히 아이를 키워도 눈에 띄는 성과가 없으니 나의 시간이 무의미한 반복뿐인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도 닦듯 애를 키워온 지 어느덧 3년. 칠흑같이 어둡던 육아 터널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책을 만났다. 이슬아의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작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인 엄마와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들이 어쩌면 길고 긴 육아의 목적이자 결과 아닐까 싶다. 이슬아의 엄마, 복희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혈연 말고 우정
"우리는 서로를 선택할 수 없었다." 책의 첫 문장이다. 이 말만큼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본질을 꿰뚫는 문장이 또 있을까. 우리는 모두 우연히 만난 존재들이다. 서로를 고를 수 없던 두 사람이 만났고,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모른 채 출발했다. 그녀는 이어서 말한다.
"어떤 모녀가 함께 자라도록 도운 풍경을 묘사한 책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 성인이 되기까지의 역사, 혹은 한몸에 있었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독립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우정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우정. (...) 서로가 서로를 고를 수 없었던 인연 속에서 어떤 슬픔과 재미가 있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육아는 부모가 아이를 일방적으로 키우는 단순 노동이 아니다. 서로를 모르는 부모와 아이가 만나 새롭게 쌓아가는 우정의 역사에 가깝다. 이 책을 읽은 뒤로 나는 육아가 힘들 때마다 속으로 되뇐다. '나는 지금 이 아이와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② 엄마 말고 복희
그녀의 책에는 '복희'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작가의 엄마다.
"태어나보니 제일 가까이에 복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몹시 너그럽고 다정하여서 나는 유년기 내내 실컷 웃고 울었다. 복희와의 시간은 내가 가장 오래 속해본 관계다. 그가 일군 작은 세계가 너무 따뜻해서 자꾸만 그에 대해 쓰고 그리게 되었다."
이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딸이 부모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엄마라는 희생의 세월 말고 '이주영'이라는 인물을 떠올릴 수 있는 서사, 둘이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추억, 엄마의 이름 석 자를 부를 마음이 들 정도로 깊은 우정. 이것들이 내 육아의 결과이기를 바란다.
엄마의 서사와 모녀의 추억이 꼭 비싸거나 완벽할 필요는 없다. 엄마 복희는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평생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살았다. 경리, 닭갈빗집 서빙, 빵집 직원, 보험설계사, 구제옷 가게 주인 등. 먹고 살기 위해 쉴 틈 없이 자신의 시간을 팔아왔다.
복희의 가난은 딸 슬아에게로 이어진다. 슬아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비와 월세를 벌기 위해 투잡, 쓰리잡을 뛴다. 그러나 슬아는 엄마를 부끄러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을 벌어 엄마에게 시간을 선물하는 게 꿈이라면 꿈이다. 엄마가 일을 멈춰도 되는 시간, 아프면 몸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욕심이 현실을 앞서가곤 한다.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만 줘야 한다는 조바심이랄까.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은 용기를 얻게 됐다. 내가 아이에게 주는 것들이 슬프고 초라해도 진심이 담겨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작가는 엄마의 진심을 알았을 것이다. 가족이 입고 먹고 잘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일상을 지키기 위해 복희가 분투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복희가 슬아를 사랑하는 법이었다는 것도. 나도 나답게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려고 한다. 그 마음이 아이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
③ 훈육 말고 응원
엄마 복희는 딸 슬아에게 자신의 옳고 그름을 강요하지 않는다. 슬아만의 가치관과 판단을 존중한다. '부모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식으로 통제하지도 않고, '네 맘대로 하라'며 방관하지도 않는다.
대학을 다니며 각종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슬아는 어느 날 깨닫는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야 적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고심 끝에 슬아는 누드모델에 지원하기로 마음먹고 부모님에게 알린다.
슬아가 누드모델로 일하겠다고 애기했을 때, 복희는 등짝 스매싱을 날리는 대신 이렇게 묻는다. "무엇을 준비해야 해?" 슬아는 답한다. "무대에 서기 전에 걸치는 가운이 필요해."
복희는 자신의 구제 옷가게로 가서 가장 고급스러운 코트를 가져와 선물하며 말한다. "알몸이 되기 전에 네가 걸치고 있는 옷이 최대한 고급스러웠으면 해." 복희는 그런 엄마다. 섣불리 판단하거나 통제하지 않는 사람. 나 몰라라 방임하지 않는 사람. 딸의 삶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차원을 넘어 슬아의 선택을 궁금해하고 응원해주는 사람.
누드모델로 일하겠다는 딸에게 코트를 선물해주는 포용력은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일이었을 테다. 아이가 밥을 안 먹겠다고 떼를 쓸 때, 얌전히 앉아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닐 때, 복희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험이 복희만의 포용력으로 발전했을 테고, 슬아는 그런 복희를 신뢰하며 자신감 있게 세상으로 나아간 게 아닐까.
작가는 엄마와의 역사를 "나를 씩씩하게 만든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추억의 힘을 생각했다. 추억의 기본 단위는 일상이고, 육아는 부모와 아이가 수많은 일상을 일궈가는 일이다. 당장 극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지만,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지루한 일상이 아이의 마음 어딘가에 추억이라는 동력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육아가 신명나는 일이 되진 않을 것이다. 여전히 아이와의 실랑이는 고되고 피곤하다. 다만 더는 바위를 굴리는 시시포스처럼 괴롭진 않다. 고된 일상이 도달할 곳, 끝없는 반복이 불어올 변화를 알게 됐으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를 지키고 싶은 엄마들을 위한 미디어 '마더티브(http://brunch.co.kr/@mothertive)'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