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 8세기 한 목동이 별들이 가득한 들판에서 사도 야고보의 유해를 발견한 후, 산티아고 순례길은 카톨릭의 3대 성지가 되었다. 지금도 한해 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종교뿐 아니라 자아성찰, 힐링, 건강, 문화체험 등의 이유로 이 길을 걷는다. 한국에서도 산티아고 순례길은 점점 유명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대체 어떤 매력이 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총 4번 방문했다는 순례자를 만나봤다. - 기자말
산티아고 순례길, 4040km의 이유
도자기 공예 작가 도화(陶花) 김소영씨는 최근 4번째 산티아고 순례여행을 마쳤다. 그녀의 산티아고 순례길 사랑은 산티아고 순례자 사이에서 이미 유명하다.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산티아고를 다녀온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활동중이기도 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받은 영감을 모티브로 도자기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그녀가 지금껏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거리를 합하면 모두 4040km, 서울 잠실에서 부산 해운대까지의 거리가 약 400km인 것을 생각해보면 잠실-부산을 총 10번 걸은 셈이다.
2011년에는 가장 대중적인 루트인 프랑스길 800km를 걸었지만 그 후 점점 루트가 다양해지고 걸음 수도 늘어났다. 2015년엔 프랑스길과 피니스테라, 묵시아까지 930km 걸었고, 2016년에는 프랑스길과 북쪽길 1230km, 2018년엔 프랑스길과 포르투갈길 1080km를 걸었다.
첫 사랑과 이별 후, 첫 번째 순례길을 결심했다
"10년 전 즈음, 첫 사랑과의 이별로 시련을 겪던 중 파울로코엘료의 '오 자히르'라는 책을 읽게 되었어요. 사라진 사랑하는 한 여자를 찾아 떠나는 한 남자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 책이 계기가 되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슴에 품게 되었죠."
언젠가는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걷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생이던 그녀는 매년 방학이면 혼자 배낭을 메고 국내를 일주일씩 떠돌기 시작했다. 그 '언젠가는'이 '지금'이 되었던 것은 직장을 그만두고 취업준비를 하던 때였다.
도예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던 그녀는 현실적으로 영업과 마케팅 분야 취업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고, 정말 원했던 회사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지금' 산티아고 순례길을 향해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가 2011년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티켓을 끊고 나니 경비가 부족했다. 고민 끝에 그녀는 도자기로 만든 카네이션 브로치와 반려동물 인식표 목걸이를 만들어 블로그, 트위터 등 SNS를 통해 판매해 봤다.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아 그 판매 수익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직접 만든 도자기 공예품을 팔았다. 그녀는 매일 작품을 판다는 하얀 천을 배낭에 달고 길을 걸었다.
그렇게 첫 번째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돌아와서 앞으로의 삶을 고민할 때, 여행 경비 마련을 위해 도자기를 만들어 판 것을 떠올렸다.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기 위해 만들었던 도자기 작업을 통해 제가 정말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죠. 그리고 SNS를 통해 작품을 실제 판매한 경험을 통해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되었어요."
인생의 성장과 함께 한 산티아고 순례길
그렇게 김소영씨는 첫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 후 전업 도자기 작가로서 삶의 방향을 전환했다. 물론 가진 것 하나 없던 취준생이 갑자기 작업실을 차리고, 전업 도자기 작가로 삶을 꾸려나갈 순 없었다.
초반에는 작업실을 구하기 위해 돈을 빌려 작품 활동을 했다. 그리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문화센터, 방과 후 교실 등에서 어린이 미술 강습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밑바닥부터 시작해 나갔다.
하지만 4년간 돈을 벌고, 빌리고, 갚고, 투자하며 사업을 하는 동안, 김소영씨는 어느새 도자기로 인해 회의감이 들었다. 좋아서 시작한 작품 활동이지만 전업 작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결국 2015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두 번째 산티아고로 떠나게 되었다.
"2011년 첫 순례길이 무모함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2015년 두 번째 순례길은 간절함과 절실함이 가득했던, 아직은 많이 내려놓지 못했던 저 자신이 비움과 내려 놓음을 연습하는 과정이었어요."
그렇게 인생의 기로에 접할 때마다 그녀는 순례길을 찾았다. 세 번째 순례길이 그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을 복습하며 인생에 적용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올해 다녀온 네 번째 순례길은 비움과 내려놓음을 넘어서, 이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여정이었다. 그렇다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4번 걸은 그녀가 말하는 그 길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산티아고 순례길은 길 위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또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이어나가요. 그렇게 길을 걷는 동안 순례자의 감정 속에는 사랑, 우정, 상처, 아픔, 기쁨, 슬픔 등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가게 되죠."
김소영씨는 이 여정들이 마치 몇 십 년에 걸쳐 배우는 인생을 축약적으로 체험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네 번이나 걸어도 그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길에 대한 생각이 작품이 되었다
네 번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며 김소영씨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받은 영감을 모티브로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순례길의 상징 문양으로 만든 목걸이, 팔찌, 배지부터 다양한 큰 액자, 거울 작품들 등.
그리고 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사진보다 더 의미있게 남기고 싶어 10년 넘게 그리지 않았던 수채화 붓과 물감을 들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길 위에서 그곳의 풍경을 그림에 담았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을 바탕으로 엽서와 2018년 달력을 제작해서 판매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다이어리북과 배지, 마스킹 테이프, 손수건 등 그녀는 순례길의 추억이 일상에서 다양하게 쓰일 수 있도록 다양한 상품들을 만들고 있다.
김소영씨는 현재 네 번째 개인전 <까미노 블루>를 전시중이다. 8일부터 16일까지 서촌의 카페 알베르게에서 만날 수 있다. 이번 개인전에는 지난 7년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만 선별하여 출품했다.
"그동안 제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과 추억들이 다른 사람들의 추억을 되살린다는 점이 작품 활동의 원동력인 것 같아요.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제가 꿈을 이루는 길에 늘 함께 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어요."
산티아고 순례길, 자신만의 보물을 찾는 여정
김소영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떠올렸다. 이 유명한 이야기에는 늙은 왕의 조언에 따라 보물을 찾아 떠난 소년이 나온다. 그는 여행 중 가진 돈을 모두 잃고 여비를 벌기 위해 임시로 크리스털 가게의 점원으로 일한다.
그러나 장사에 성공하며 돈을 벌기 시작하자 그는 자신이 보물을 찾아 나선 길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느덧 고향에서 장사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돈을 모았을 무렵, 소년은 우연한 기회로 다시 늙은 왕의 조언을 기억했다.
"절대로 꿈을 포기하지 말게. 표지를 따라가."
그때 소년은 깨달았다.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양치기로 돌아갈 수 있고, 크리스털 가게 장수도 될 수 있지만 보물을 찾아 피라미드를 향해 갈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음을... 결국 소년은 다시 길을 떠났고 마침내 원하던 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좀 더 안전한 길을 선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한 번만 더 용기를 내 모험을 선택한다면 김소영씨처럼 또 다른 기회를 마주할 수도 있다.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고 해서 당장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순례길을 걸으면서 몸으로 배우고 가슴으로 새긴 것들이 인생에 깊게 남아 자신만의 보물을 찾기 위한 표지가 된다. 누군가에겐 그것은 종교이고, 누군가에겐 진리이고, 누군가에게 꿈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김소영씨에게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은지 물어봤다.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은 제게 고향과 같은 존재예요. 사람들이 고향에 매년 방문하듯 저도 자주 방문하고 싶죠. 그리고 도자기 작품 활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의 매력을 전파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