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는 1987년에 진즉 감옥 갔어야 해요. 감옥 안 가더라도 최소한 법관직에서는 물러났어야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10월 14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인문교양특강에서 최근 사법농단 의혹으로 수사중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일찍이 '반(反)헌법행위자'로 규정한 학자 중 한 사람이다. 사건 전모가 드러나기 전인 지난 2015년부터 <반(反)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작업을 주도해온 한 교수는 초임 판사 시절부터 간첩조작 등 정치적 판결을 일삼은 양 전 대법원장의 이력에 주목해왔다. 그에 따르면 현재 사법농단 사태의 몸통인 양승태라는 '괴물'은 우리 사회가 헌정질서를 파괴한 기득권층을 제대로 단죄하지 않은 결과 탄생했다.
과거청산 없는 민주화가 낳은 '괴물' 양승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사업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공직자로서 내란, 부정선거, 민간인 학살, 고문 및 간첩조작, 언론탄압 등 인권과 헌정을 유린한 사람들을 기록해 고발하는 일이다. 2015년 10월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상임대표 이만열)가 닻을 올렸고, 1년6개월여 준비기간을 거쳐 2017년 2월 반헌법행위 집중 검토 대상자 405명을 발표했다. 지난 7월 12일에는 헌법제정 70주년을 맞아 '헌정사 적폐 청산과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1차 보고회를 열고 양승태·고영주·박처원 등 115명을 조사한 결과를 내놨다.
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인 한 교수는 저널리즘스쿨 특강에서 "최근에 와서야 양승태가 사법농단 사태의 주역으로서 '사상 최악의 대법원장'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2017년 초 처음 집중 검토 대상자 405명을 발표할 때부터 이미 그는 반헌법행위 '선두주자'였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양승태는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던 지난해 2월 이미 <반헌법행위자열전> 대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1975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법관 생활을 시작한 이래 6건의 간첩조작사건과 12건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특히 1976년 재일동포 학원간첩단 사건은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 기획한 간첩조작사건이다. 영화 '자백'이 조명하기도 했던 이 사건을 포함해 양 전 대법원장이 판결한 간첩사건은 모두 재심 등을 거쳐 무죄로 밝혀졌다.
한 교수는 "당시 박근혜-황교안에 현직 대법원장까지 반헌법행위자로 적시하는 건 우리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면서도 "양승태가 과거 저지른 일들을 보면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양승태를 '과거청산 없는 민주화가 낳은 최악의 괴물 대법원장'으로 평가한 그는 "사법부의 이익을 위해 행정부와 거래를 시도한 '양승태 사법부'는 독재자의 시녀 역할만 하면 되던 군사정권 시절을 뛰어넘는다"며 "박정희 때 민복기, 전두환 때 유태흥 대법원장보다 더한 게 박근혜의 양승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40년 전 공안세력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자는 움직임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 등 범정부 차원 기구가 대표적이다. 당시에는 주로 일제강점기 친일 행각이 화두였고, 2009년 친일 행위자 4800여명을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수록된 인물 가운데 생존자는 단 2명이었지만 기득권층 반발은 격렬했다. 보수정권은 '통합' '미래'라는 구호를 내세워 과거사 문제를 흐지부지 덮었다. 그사이 김기춘 등 과거 공안세력은 다시 권력을 잡고 민주주의를 흔들었다.
한 교수가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작업에 뛰어든 것도 과거 헌법 파괴를 일삼던 자들이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권력자로 군림하는 상황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김기춘이 간첩을 만들고, 판사 양승태가 판결하는 그림은 40여년 뒤 청와대와 대법원에서 여전히 반복됐다. 한 교수가 "이번 작업은 결코 과거 얘기가 아니며, 우리 현대사 적폐 중의 적폐가 여기 다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 시절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유명한 김기춘의 초원복집 사건을 담당했던 정홍원과 김진태는 박근혜 정부에서 각각 총리와 검찰총장을 지냈다. 이들은 당시 사건의 본질을 부정선거에서 불법도청으로 흐려 김기춘을 구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탄핵 정국에서 대통령권한대행을 지낸 황교안 전 총리 역시 '미스터 국가보안법'이라고 불리는 공안검사 출신이다.
이명박 정부 때 총리를 지낸 김황식도 판사 시절 재일동포 간첩 조작에 관여했다. 이들 모두 <반헌법행위자열전> 집중 검토 대상자다. 양승태와 함께 지난 7월 1차 보고 대상 115명 중 주요인물 9인에 이름을 올린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1980년대 부산지역 최대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 담당 검사였다. 최근에는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헌법행위 심판이 곧 친일 청산이다
물론 '반헌법행위자'로 지목된 이들의 인권유린 행위는 자연스레 친일까지 연결되는 사례가 많다. 영화 '1987'에도 소개됐듯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은폐를 주도한 고 박처원 치안감은 해방 당시 열여덟 살이라 친일과는 무관하지만 친일 경찰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 밑에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등 해방 직후 수없이 자행된 민간인 학살 역시 일제강점기 친일을 일삼던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정권에 부역하면서 저지른 만행이다.
반면 독립투사들은 권력을 쥔 친일파의 등쌀에 살아남기 힘들었다. 한 교수는 "해방 전 일제에 한번도 잡히지 않았던 약산 김원봉이 해방 후 월북한 것도 친일파에게 온갖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약산의 가족들은 한국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몰살당했다.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 김창룡 역시 해방 이후 이승만 치하 반민특위에서 무죄를 받고 악랄한 반공투사로 변신한 인물이다.
한 교수는 "정작 친일파가 저지른 정말 나쁜 짓들은 해방 후에 일어났다"며 "해방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은 일제강점기 '친일'만이 아니라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반헌법적 행위를 저질렀는지 주목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지금도 김창룡의 묘는 백범 모친 곽낙원 여사와 장남 김인이 잠들어 있는 대전현충원에 있다.
기득권 반발, 시민·언론이 막아야
<친일인명사전> 발간 때 그랬듯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작업 역시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반발을 사고 있다. <TV조선>은 열전 편찬 소식이 알려지자 '금수저 좌파, 한홍구의 정신세계'라는 17분짜리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한 교수는 "뉴스 프로그램에서 17분짜리 코너는 핵폭탄이라도 터져야 만들어지는 거 아니냐"면서 "그만큼 (이번 작업은) 위험부담이 있다"고 토로했다.
반헌법행위 조사 기준을 당시 헌법과 법률에 비추어 명백히 범죄행위가 성립되는 경우로 한정한 것도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한 교수는 "제헌헌법이나 심지어 유신헌법에도 '소위 '빨갱이'로 의심되는 사람은 잡아다 고문하고 죽여도 좋다'는 얘기는 없다"며 "기득권층의 반발이 계속되겠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반헌법행위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끔찍한 일들을 저질러 왔는지 끝까지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업은 진실화해위원회 등 과거 범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기구와 달리 철저히 민간 차원에서 시민편찬위원들 모금을 받아 추진된다. 정부 지원을 받을 때 생길 수 있는 불필요한 논란을 의식해서다.
한 교수는 <반헌법행위자열전>이 간행되기까지 앞으로 적어도 3년은 더 걸릴 것으로 본다. 수십 년에 걸친 개인 수백명의 일대기를 추적하는 일이 쉽지 않아 집중 검토 대상자 405명의 조사보고서를 모두 완성하는 것만으로도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우리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흘린 피에 비해 그다지 많이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며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이)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하는 일인 만큼, 시민과 언론이 어떤 형태로든 지켜봐 주고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만드는 비영리 대안매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