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
11월 30일경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3선 시장이 된 후 이러저러한 일정들을 매일 소화하는데, 이게 원래 내가 하려던 정치의 모습이 맞나 의문이 든다. 고고한 시민운동가로 남지 않고 뭔가 바꿔보자고 정치판에 온 건데, 요즘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박원순다움'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박 시장이 서울시장 보궐선거로 정치에 뛰어든 것이 올해로 8년째. 박 시장이 한 번쯤 이런 고민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박원순의 2018년은 말 그대로 '롤러코스터 증시' 같았다. 오전 증시의 강세를 오후까지 이어가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전반기 활동의 초점은 온통 '3선 레이스'에 맞춰졌다. 일각에서는 201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그가 중도하차한 점을 들어 "유권자들이 3선 시켜주고 (2022년 대선) 재도전 기회까지 주진 않을 것"이라고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박 시장도 '3선 도전'에 대한 세간의 시큰둥한 시선을 잘 알았다. 그는 "서울시장을 두 번 하나 세 번 하나 정치적으로는 마찬가지"(5월 10일 직원 조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압승으로 논란을 잠재웠다. '안마당 서울'에서만큼은 존재감을 인정받으려는 듯 민주당의 야전사령관을 자임했다. 결과는 서초구 1곳을 제외한 전체 구청장과 대부분의 시·구의원들의 동반 당선이었다.
특히 '1강 2중'의 구도로 끝난 본선 결과(박원순 52.8%, 김문수 23.3%, 안철수 19.6%)는 2017년 대선(문재인 41.1%, 홍준표 24.0%, 안철수 21.4%)과 놀랍도록 유사한 패턴을 보였다. 지리멸렬한 야권이 특단의 승부수를 띄우지 않는 한 여권 내부에서도 "2022년 대선은 박원순으로 해볼 만하지 않겠냐?"는 얘기가 나올 만한 전적이었다.
그런데 후반기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싱가포르에 리콴유 세계도시상을 받으러 가서 "여의도를 통으로 재개발하겠다"(7월 8일)고 한마디 한 뒤 서울의 부동산 시장을 들쑤셨다는 정치적 책임을 뒤집어썼다. 박 시장이 강북에서 한 달 살이 끝에 내놓은 '강남·북 균형 발전' 정책의 효과를 반감시킬 정도로 그가 입은 이미지의 타격은 컸다.
여의도 개발 논란은 발언 취소로 불길이라도 잡을 수 있었는데, 10월부터 촉발된 서울교통공사의 채용 비리 의혹은 실체가 없는 '유령과의 싸움'이라 더 답답한 상황이다. 서울교통공사에서 함께 근무하는 친인척 비율을 나타내는 숫자(11.2%) 하나로 촉발된 의혹 때문에 박 시장은 내년 국회 증언대에 서야 한다.
박 시장이 참모들에게 "말 한마디 편하게 못 한다"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일도 잦아졌다고 한다. 중국 베이징대 학생의 질문에 "(국회 국정조사를) 돌파하고 나면 조금 더 강력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답한 것은 그의 권력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됐고, 국회의원들의 세비 인상을 비판하는 페이스북 글은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의 반(反)정치 코드로 읽혔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누가 3~4년 뒤 여당의 대통령후보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박 시장이 최종후보군에 들어갈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처럼 강력한 원톱 주자가 없는 여당 내부의 지형도 2022년 경선이 2017년과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것임을 보여준다.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지낸 김성태 의원은 "내가 협상하면서 보니까 박원순 시장이 민주당에 가진 영향력이 최소 30%는 넘어 보였다"(13일자 중앙일보 인터뷰)고 평했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가 됐든 큰 선거가 없는 2019년은 정치인으로서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조언 형식을 취했지만, 그 자신이 "우리 사회에 산적한 개혁 과제들이 많다. 그중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것들도 많다. 이런 것들을 과감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5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 '과감한 개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책임은 박 시장도 나눠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이다.
박 시장이 말한 '박원순다움'으로 얘기를 다시 돌려보자. 박 시장은 갈등의 현장에 제때 가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참모들에게 얘기했다.
과거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받는 현장에 가서 비를 함께 맞아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존재감이 있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일단 가면 이러저러한 약속을 해줘야 한다"는 반론에 부딪혀 현장에는 아예 가보지도 못할 때가 많다는 얘기였다.
박 시장이 최근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아현2지역 철거민 박준경씨의 빈소를 찾고(12월 5일), 철거민 대책위 관계자들을 잇달아 면담(같은 달 11일)한 것에 대해 참모들은 "반대 의견이 많았음에도 결행했다는 점에서 시장이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박 시장의 행보가 여느 정치인들처럼 '보여주기'로 비치지 않으려면 '묵직한 대안'을 겸비해야 한다.
곽현 소통전략실장은 "서울시장이 모든 걸 일일이 할 수는 없고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조례와 예산으로, 그 이상의 부분은 국회 입법으로 풀어야 한다"며 "문제는 유치원 3법 논란에서 보듯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합리적 논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글을 정리하다가 박 시장이 2년 전에도 '박원순다움'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선후보 경선을 준비하던 박 시장이 2017년 1월 12일 지지자들의 단체 대화방에 올린 글의 일부는 이랬다.
"당장 장사가 안되니까 품목을 바꾸고, 포장도 잘 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박원순다움'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키고자 했던 가치와 지켜야 하는 가치로 정면승부하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 너무 바보 같은 걸까요?"
이번에는 정면승부로 그가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