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1인 통치는 끝간데를 모르는 듯 날로 폭압성이 더해갔다.
1969년에 자기 손으로 만든 헌법을 고쳐 3선 개헌 장기집권에 나서고, 1971년 4월에 실시한 제7대 대통령선거는 국가예산과 관권을 동원하여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공정선거였다면 이때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5월 25일 실시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는 등 야당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때를 전후하여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 실미도난동사건, 사법파동, 서울대 교수 600여 명의 학원자주화운동, 공화당 비주류 항명파동, 수경사 장병들의 고려대 난입사건, 전국대학생 5만여 명 고대난입군인 처벌하라는 시위 등 굴욕회담 반대시위 이래 처음으로 도처에서 반정부시위가 전개되고 각종 사건ㆍ사태가 일어났다. 그동안 박정희 정권의 은폐되었던 부정부패가 폭로되고 민심의 이반현상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민심을 수렴하거나 국정의 민주화 조치보다 더욱 탄압과 압제 쪽으로 치달았다. 학생시위 진압용으로 위수령발동(1971. 10. 8), 시위주동학생 174명 제적(10.18), 국가비상사태선포(12. 6)에 이어 사실상 유신의 전조격인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화당 단독으로 처리했다.
이와 같은 경직된 시기에 원주에서 저항의 횃불이 타올랐다.
1970년대 민주화의 전주곡이었다. 10월 5일 원주시내 원동성당에서 지학순 주교가 앞장서고 사제ㆍ수도자ㆍ평신도 등 1,500여 명이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해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부정의 무리를 무찌르기 위해 총궐기하자"는 선언문이 발표되고, 경찰의 포위속에서 3일 동안 이어졌다.
지학순은 1965년 원주교구가 설립되면서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고 이 해 6월에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그는 원주교구의 교세 신장과 발전에 주력하는 한편 주민들을 위해 각종 교육 복지 기관을 설립하고, 신용협동조합운동을 도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장일순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가톨릭 주교와 평신도의 위상을 뛰어넘어 시대정신을 함께 실천하는 동지적 관계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 원주를 '1970년대 민주화의 성지'로 만드는 주역이 되었다.
지학순이 1952년 사제로 서품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군종신부로 일할 즈음 장일순은 가톨릭 신자로서 미군 통역관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복무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그 때에 서로 만났을 지도 모른다. 설혹 만나지는 않았을 지라도 두 사람은 민족사의 비극을 공유했을 것이다.
장일순은 시대정신과 정의감이 넘치는 지학순 주교의 설교를 듣고,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으로부터 개혁사상과 동서양의 고전에 관해 속내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넓혀나가고, 이런 정신은 이웃으로 널리 퍼졌다.
원주의 민주화운동은 가톨릭을 매개로 결합한 두 인물.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의 역사적 활동과 연결된다.
지학순 주교는 1965년 원주교구의 설정과 함께 주교로 부임한 이후, 교구내의 광산 노동자, 농민들의 참상에 주목하고 이들의 생활개선을 위하여 신용협동조합운동, 수재민 구호 활동 등을 열정적으로 전개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원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던 장일순은 이때부터 이 운동의 전개, 주요 실무자의 충원 등을 담당하였다.
김지하 역시 장일순 선생을 통하여 1971년부터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전개된 주요 활동이 1971년의 '부정부패 추방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 주장은 노동자, 농민의 가난은 자신의 게으름, 무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과 그와 결탁한 기업주 등의 부정부패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1974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했다. (주석 1)
장일순은 1970년대에 들어 신협운동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더욱 깊이 참여한다. 혹자들은 정치 활동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정치가 아닌 민주화운동이고 인권운동이었다. 황필호 교수와 나눈 TV방송 내용이다.
저는 원래가 정치활동 기질이 아닙니다. 바른 소리라고 할까. 겨레의 자각을 촉구하다 보니까 자연히 집권층은 기분이 나빴겠죠. 그렇게 되니까 용공이라는 라벨을 붙여서 투옥을 시키고 그렇게 되더군요.
70년대 들어와서 반독재투쟁을 조직적으로 했는데, 원주에서 많은 뜻있는 분들이 그렇게 해야 되겠다고 하는 내적인 성숙이 있었고, 또 한 가지는 60년대 말에 이미 박정희 정권은 굉장히 경직화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국민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경우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정부가 대처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대처능력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되니까 이 시기에 각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해서 교회가 사회의 그리스도가 돼줘야 하겠다, 교회가 사회에 올바른 길을 비춰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71년 10월에 사회정의 프로테스트를 했던 것이죠.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주어진 문제에 대해 제대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열거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주석 2)
이렇게 시작된 그의 민주화운동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3대 군사독재 치하에서 쉼없이 전개되었다. 농촌운동ㆍ신협운동ㆍ민주화운동은 같은 노선의 연장이었고, 이후 생명운동과 평화운동으로 이어진다.
주석
1> 최장문, <원주의 두 지성인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 <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 17호, 2006년 가을호.
2> <반체제에서 생명운동으로>, 대담자 황필호, MBC TV 현장인터뷰, 1992년 6월 11일 방영.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