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편곡된 애국가가 선을 보였다. 금관악기와 목관악기 소리를 가미해 현대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데 편곡 초점이 맞춰졌다. 영화음악을 하는 박인영 감독이 편곡을 맡고,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서울시립합창단이 녹음에 참여했다. 박인영 감독은 지난 17일 YTN과의 인터뷰에서 "최대한 안익태 선생님의 원곡, 오케스트라 편곡 의도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조금만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애국가를 세련되게 만드는 데 참여한 분들의 노력은 충분히 감사할만한 일이다. 그런데 '애국가 작곡가가 과연 애국자였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한국 사회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의문을 품어왔다. 으레 국가(國歌) 작곡가의 자격은 '애국자'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가 작곡가는 애국자가 아니었다.
애국가가 민족반역자의 작품이라면, 애국가를 듣거나 부를 때 잡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광고 모델에 도덕적 하자가 알려지면,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제품보다는 스캔들이 먼저 떠오르는 이치와 같다.
안익태의 친일 행보
고대 이래로 국가는 음악을 국민 통치에 활용했다. 강태공의 사상을 정리한 책으로 기원전 11세기부터 주나라의 백성 통치에 활용된 <삼략>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허리를 굽혀 복종하게 하려면 예법으로써 해야 하고,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하려면 음악으로써 해야 한다."
어느 시대든 정치 권력은 사사건건 군대를 동원해 백성을 누르기보다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정치 체제가 안정되고 통치 비용(군대 양성 비용 등)도 절감된다. 그런 복종을 유도하고자 정치 권력이 사용해온 도구 중 하나가 교육이다. 음악도 그에 포함된다.
일본제국주의도 식민지 주민들의 가슴에서 저항심을 없애고자 음악을 활용했다.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손과 발을 묶기보다는 아예 마음을 묶어두는 게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일에 안익태가 가담했다. 그는 음악으로 친일 행위를 했다. 그의 친일 행적 중 하나는 일왕(천황)을 위한 음악 활동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1938년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越天樂)'를 발표했다. (중략) 원래 에텐라쿠는 일본 천황 즉위식 때 축하 작품으로 연주된 것으로, 1878년부터 근대 일본 창가로서 남조(南朝) 오충신(五忠臣)이나 충효(忠と孝) 등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주제로 한 일본 정신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환상곡 에텐라쿠>는 일왕(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는 작품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 천황을 찬양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일본의 만주 지배까지 찬미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만주 환상곡>이다.
"1942년에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국 축전곡'을 의뢰받아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큰 관현악단과 혼성 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만주환상곡·만주축전곡)을 완성했다." - <친일인명사전> 중
이 곡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제1악장은 서주(序奏)로서 축복받은 대지의 모습과, 폭정으로 짓밟힌 옛 만주가 구원자인 일본에 의해 평화를 되찾은 모습을, 제2악장은 목가(牧歌)로서 만주국 대평원의 평화를, 제3악장은 만주국이 열강들과 협력해 세계 신질서를 확립하는 모습을, 그리고 제4악장은 피날레로서 만주국이 건국 10주년을 맞는 환희를 누렸다." - <친일인명사전>
피날레에서 드러나듯이 <만주 환상곡>은 만주 땅이 '일본 식민지 괴뢰국' 만주국으로 거듭난 것을 찬양하는 곡이었다. 만주 주민들이 일제 지배 하에서 심리적으로 꼼짝 못하도록 하기 위한 작품이었다. 이 정도면, 안익태가 음악을 무기로 일본 해외 침략의 선봉에 섰다고 평가도 가능하다.
이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일본이 독일·이탈리아와 합세해 침략전쟁을 벌일 때였다. 안익태는 이렇게 만든 <만주 환상곡>을 갖고 일본 동맹국들을 방문해 연주회를 지휘했다. <만주 환상곡> 제3악장에 부합하는 행보를 보였던 것이다.
<만주 환상곡>과 <한국 환상곡>의 공통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만주 환상곡> 피날레가 4년 전 만든 <한국 환상곡>의 피날레와 똑같다는 점이다. <만주 환상곡> 제4악장을 이루는 두 부분이 <한국 환상곡> 마지막 악장을 이루는 세 부분 중 두 부분과 똑같았던 것.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음악학자 송병욱이 2007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 제27호에 기고한 '다시 보는 안익태- 애국가의 작곡가는 애국자였나'라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래의 <만주국 경축 음악>은 <만주 환상곡>과 같은 표현이다.
"<만주국 경축 음악>과 <한국 환상곡>은 주요 합창 선율 두 개를 공유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그 선율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과 신질서를 찬미하는 가사를 위해, 후자에서는 해방된 한국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사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안익태가 정말로 절절한 민족 사랑의 마음으로 <한국 환상곡>을 지었다면,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를 <한국 환상곡>의 피날레에서 가져다 쓰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애초 조선 찬미를 위해 창작한 선율을 한민족에게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던 제국주의자들의 정치 구호를 위해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송병욱은 말한다.
두 곡의 피날레가 같다는 것은, 두 곡을 지을 당시에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 환상곡>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음악가의 마음속에 들어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안익태를 옹호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환상곡>을 만든 1938년에 안익태가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면, 이 곡을 지을 당시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1938년에 그가 했던 또 다른 일은 위에서 이미 설명됐다. '덴노 환상곡'으로도 불릴 만한 <환상곡 에텐라쿠>를 바로 그 해에 만들었다. <환상곡 에텐라쿠>를 짓는 데 필요한 음악적 영감에 충만해 있었던 그 시기에 <한국 환상곡>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환상곡>과 <환상곡 에텐라쿠> 중 어느 쪽에 더 애착을 품었을까? 안익태가 어느 쪽에 애착을 더 가졌는지를 판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제 패망 뒤 그가 보여준 행동에서 너무도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언급됐듯이 <환상곡 에텐라쿠>는 "안익태가 역작으로 자부한" 작품이다. 일제 패망으로 '역작'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그는 이 곡에 '인공호흡'을 했다. 곡을 살리고자 제목을 바꾸었다.
"<에텐라쿠>로 알려진 이 작품은 1959년 <강천성악(降天聲樂)>으로 개작되었다." - <친일인명사전> 중
안익태는 해방 뒤에는 <환상곡 에텐라쿠> 연주를 더 이상 지휘하지 않았다. 대신, 1959년 이후로 <강천성악> 연주를 지휘했다. 만약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환상곡 에텐라쿠>를 억지로 만들었다면, 해방 뒤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예에 오점을 남길 수 있는 일을 감행한 것은 그가 그 곡에 고도의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명예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 곡을 지키고 싶었음을 뜻한다.
이는 <한국 환상곡>을 만든 1938년 그 해에 그가 천황 찬미를 위한 음악적 영감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황 찬미를 위한 음악적 열정에 빠져 있었던 그 해에, 다른 곡도 아니고 <한국 환상곡>을 지었다면, 민족에 대한 그의 태도가 꽤 불성실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아끼십시오"라는 말을 했던 성직자가 그 뒤 세속에 물들어 나쁜 일을 저질렀다는 게 드러난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가 했던 아름다운 말을 더 이상 아름답게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할 때만큼은 순수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애국가>를 작곡한 1935년, 당시 안익태가 절절한 민족 사랑을 품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뒤 그는 민족반역자의 길을 걸었다.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애국가>를 접할 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찜찜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애국가>를 들으면 애국심이 솟아야 하는데, 여기저기 친일청산이 되지 않은 우리 민족의 현실이 떠올라 찜찜함만 더해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애국자가 작곡한 애국가를 부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일마저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