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회 초년생이 된 친구에게 연락을 받았다. 좀체 힘든 소리를 하지 않는 친구인데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는 바싹 말라 빳빳해진 수건처럼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한마디 한마디에 '네가 오죽하면 이런 이야기를 할까' 싶어 머릿속을 헤매는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 겨우 몇 마디 건넸다. 한참 응어리를 풀어내던 친구는 "너무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노라고 말했다. 친구의 말을 듣고 헛기침을 뱉었다. '잊고 지낸 것이 무엇이든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동자로서의 삶은 노동의 몸짓을 신체에 각인시키는 과정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잠시 잊어도 좋다. 노동자들은 지금, 최대이윤창출에 최적화된 노동력으로 기능하면 그만이다. 그러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준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시나리오다.
노동자의 가치는 단 하나 생산성이다. '나는 생산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단순하지만 막강한 척도로 끊임없이 자신을 측량한다. 현대를 사는 이 사회의 노동자는 작업 현실에서 겪는 모든 실패를 나약하고 무능한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일터에서 죽는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산다.
노동시장에 편입된 인간은 개인의 개성과 특성 따위는 깨끗이 표백된, 대체해 버리면 그만인 완전한 부품이 되어간다. 시장에 나온 노동자들은 인간적 서사가 제거된 노동력 자체가 된다. 소진되고 나면 새로운 노동력으로 대체하면 그만인 상품으로 전락한다. 노동자들이 서로의 대체상품으로 존재하는 산업구조에서 노동력 제공자, 그들의 삶은 가뿐히 무시해 버려도 그만인 소수점 아래에 존재한다.
노동자의 인간성은 그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면서도 자신의 가치는 철저히 생략된 노동현장에서 급작스럽고 의도치 않게 죽음을 맞았을 때 비로소 포착된다. 올 겨울 뜯지 않은 컵라면 몇 개와 때 묻은 수첩을 유품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하청노동자 김용균씨도 그렇게 우리의 시선에 들어왔다.
'위험의 외주화를 막아라', '하청업체 노동자의 노동현실을 개선하라'는 표어를 하염없이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이들은 김용균 씨의 죽음에서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다. 운 좋게 살아남은 순간들을 플래시백하며 사람들은 이번만은 제발 달라져야 한다고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이들은 또 다시 운 좋게 살아남을 순간들에 감사하는 나날을 보내게 될 수도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이 나라는 늘 그랬다.
재작년 5월 구의역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하청업체 직원 김군이 사망했을 때도 그랬다. 김군의 죽음을 당면한 공포이자 연대하지 못한 죄책감의 순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9-4번 승강장에 모여 추모와 위로의 형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지지했다. 그 때도 사람들은 하청, 재하청으로 이어지는 비인간적 산업구조를 개혁하라 외쳤다.
그러나 2년이 흐른 지금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구의역 스크린 도어에 또 다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는 날, 김 군을 대체한 누군가는 9-4 승강장의 의미를 알면서도 고장난 스크린 도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기억하는 사람보다 잊어버린 사람이 더 많겠지만, 2017년 5월에는 거제 삼성중공업 선박 건조(마틴링게 프로젝트) 현장에서 발생한 크레인 충돌 사고로 여섯 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지난 18일 '한국 정부의 공적개발원조(ODA)사업과 초국적 기업의 인권침해에 문제를 제기하다' 기자간담회에 발표자로 나선 이은주 활동가(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는 김용균씨 사건과 마틴링게 프로젝트 피해 노동자들의 현실을 되짚어보며 "결국 변하는 것은 없다"는 말을 꺼내놓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김용균씨와 구의역 김군은 '젊은 하청업체 직원'이라는 속성으로 사회적 문제의식이라도 환기할 수 있었지만 삼성중공업 피해 노동자들은 세상의 관심은커녕 여전히 홀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동료가 죽은 그 크레인에 의지해 지상으로 내려오는 자신은 인간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삼성중공업 하청업체 직원의 자조는 결국 인간으로 살기 위해 감행한 일련의 결정이 결국 인간성을 부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파국으로 개인을 내몰고 있다는 경고이자 절규에 다름없다.
그뿐이겠는가. 모순적이게도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두고 죽음의 외주화를 이야기하는 이 시기에도 탄력근로제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논의이다. 인간성을 말살하고, 인간을 노동력으로 치환하려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결코 다르지 않은 문제임에도 탄력근무제 논의는 "확실히 일하고 여유롭게 쉰다"와 같은 알량한 허울을 뒤집어 쓰고 선진 근무형태인 양 우리의 귓전을 간질인다. 그러나 지난 11월 23일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CBS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지적했듯이 "기계는 몰아 쓰다가 한동안 안 쓸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일하는 자의 인격이 말살되는 단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 사회를 바라보며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회가 인정하고, 기억하고, 대우하는 인간은 누구냐고. 인간됨을 포기해야 하는 노동하는 삶은 지금도 쉼 없이 지옥의 문턱을 향해 간다.
위험의 외주화를 그만두라는 외침이 무색하게 지금 이 시각 누군가는 텅 빈 컨베이어벨트 작업장으로 걸음을 떼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운 좋게 살아남았음에 안도하고, 먼저 간 이들의 피에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끼며 "이 순간 나는 인간이 아니구나" 읊조려야 하는가.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라는 비명이 2018년 끝자락을 적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