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바이오로직스의 상장 유지
지난 10일 한국거래소는 기업심사위원회를 열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유가증권시장 상장 유지를 결정했다. 기업심사위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경영 투명성과 관련해 일부 미흡한 점이 있지만 기업 계속성과 재무 안정성 등을 고려해 상장을 유지하기로 했다"며 그들의 결정이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보수 언론과 경제지 등은 환영 일색의 기사를 내보냈다. 아직 금융당국과의 소송이 남아 있어서 우려는 남아 있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며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승리를 기정사실화 했다.
<'삼바'의 화려한 복귀, 거래 재개 첫날 주가 18% 급등>, 조선일보
<증권가 "삼성바이오 불확실성 해소" 안도>, 매일경제
반면 시민사회는 한국거래소의 이번 결정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삼바' 사태가 또 하나의 '대마불사' 사례로 남게 되었다며, 삼바 상장의 책임이 있는 한국거래소가 책임 회피를 위해 섣불리 '면죄부'를 준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가 삼성공화국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고,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굳건한 삼성의 위세. 이것이 과연 삼성의 돈과 권력 때문만일까? 아니면 그래도 자식들의 삼성 취업을 간절하게 바라는 대한민국 부모들의 한결같은 믿음 때문일까?
강수돌 교수는 이와 현상을 저서 <중독의 시대>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조명한다. 그는 우리 사회를 중독사회라고 규정한다. 중독이란 감기와 같은 질병으로, 한 번 걸리면 빠져나오기 어려운데 우리 사회는 바로 일중독에 빠졌다는 것이다. 현재 많은 이들이 삼성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가 중독에 빠진 증거이다.
중독에 빠졌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통제 만능에 빠져 상황을 조작하려 하고, 주변 사람들을 모두 중독에 빠지게 하고,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스스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특정인을 희생양 삼아 자신의 책임에서는 벗어나려는 중독 증상.
최근에는 많은 이들이 '워라벨'을 운운하며 삶의 가치와 여유를 더 추구하는 듯하지만 저자는 그 역시 잘못된 해법이라고 일갈한다. 결국 과로와 스트레스를 낳는 구조를 그대로 놔둔 채, 개인적으로 해법을 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위 '소확행'을 위해 여행을 가고, 전시회 등을 찾는 것은 신자유주의적인 해법으로서 소비를 촉진시키고, 일중독을 더욱 심하게 만들 뿐이다.
사회 전체가 일종의 중독자처럼 비정상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마치 이것이 정상인 양 개인들이 수용하고 있는 맥락 위에서 각종 중독을 직시해야 한다. 특히 온 사회가 경제성장에 중독된 채, 노동(고용)을 개인의 정체성 확인이나 생계수단 확보의 유일한 길이라 내면화해버린 상태(노동사회)가 가장 심각하다 – 9p
중독의 원인
그럼 그와 같은 중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우선 중독의 원인부터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중독은 그 어떤 상황이나 조건 속에서도 자기 내면의 느낌이나 욕구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내적인 자율성이 사라질 때 겪게 된다. 자율성이 사라지면 인간은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갖게 되고 이를 다른 방법으로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에 중독된다. 즉, 중독이란 두려움에 대한 억압과 회피의 수단이다.
예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알코올 중독이나 게임 중독 등을 보자. 환자들이 술이나 게임을 하는 이유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함이다. 현실에서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나름의 만족감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해법은 아니기에 계속 더 센 자극을 원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개인을 파탄시키고 만다.
이와 같은 중독의 프로세스는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두려움은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겪게 된 트라우마다. 아직까지 광장에서 북한 인공기를 불태우고 과도하게 미국만을 외치는 노인들.
청산하지 못한 역사와 계속되는 분단체제는 우리로부터 그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응시할 기회를 빼앗아 갔고, 그 트라우마는 세대를 뛰어넘어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역사적 비극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개인들의 비틀어진 생존방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한국전쟁의 대규모 폭력과 비참함이 불러온 트라우마 과정은 그대 한국 사회를 지속적으로 규정짓는다. 여기서 핵심은 그로 인한 두려움(나약함, 열등감 등)인데, 이것이 전사회의 심층에 단단히 자리 잡아 사람들의 느낌, 생각, 행위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 283p
깊이 억압해버린 두려움을 우리가 그 뒤로도 제대로 해소,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로 인해 1세대가 경험한 트라우마가 대를 이어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 유전적 전승이 아니라 사회적 전승이다 – 285p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생존자들은 대체로 공격자(가해자)이던 폭력적 지배세력의 선전 논리를 내면화한 결과, 반공주의 히스테리(레드 콤플렉스)라는 형태로 자아를 억압해왔다. 그 결과 불의에 대한 저항이나 진실을 위한 투쟁은 늘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또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로 사회적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 82p
일중독의 대한민국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와 같은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결과, 다른 무언가에 중독되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무언가가 바로 일중독이라고 지적한다. 즉, 우리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며 치켜세우기 바쁘지만, 그것은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사회가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노동사회를 전면화하고 일중독에 빠진 결과일 뿐이다.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해 죽어라 일만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자위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다.
한국사회는 자신의 자원을 넘어 살았다. 여기서 '자신의 자원을 넘어'라는 말은 한마디로 한국 경제가 민중과 국토를 '초과 착취'했다는 말이다. 사실 자본주의 축적이란 결코 자급자족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부단히 바깥에서 유입되는 살아 있는 에너지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상 파괴적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민중에 대한 수탈은 물론이고, 각 자본주의 사회 내 노동대중에 대한 착취 역시 생명력에 대한 파괴다. 이것을 흔히 '경제성장'이라 부른다 – 83p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일중독에 빠진 사회. 저자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모든 상황을 중독과 관련한 병리적 현상으로 규정한다. 무한 경쟁 시스템과 높은 자살률, 극단적인 양극화와 천박하기 짝이 없는 속물주의 등 그 모든 것은 일중독에 빠진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삼성공화국은 그런 우리의 일중독 시스템이 쌓아올린 하나의 표상이다.
한국은 1990년대 초만 해도 자살의 무풍지대였다. 자살 사망률이 10만 명당 7.3명에 불과해 자살은 개인적인 불행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자살이 급증해 2003년부터 교통사고 사망자를 앞지르기 시작, 지금(2010년 기준 10만 명당 약 30명, 하루 평균 43명)은 교통사고 사망자의 2.3배나 된다 – 104p
우리는 '명함 사회'에 산다. 명함 속에 표시된 나의 일이나 나의 소속, 나의 지위가 곧 나 자신의 정체성이다. '나'라는 사람은 곧 내가 하는 일이다. 만일 일자리가 없거나 일을 잃어 실업자가 되면 마치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 직장인들이 해고의 두려움 속에 갇혀 사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동과 동일시한 결과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고 일은 일일 뿐이다 – 188p
덧붙여 저자는 노동자의 복지를 주장하는 시민사회의 요구나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역시도 일중독의 하나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비록 이전의 신자유주의적 요구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는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일중독 사회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나가고 주도해나가는 중독사회에 대하여 균열과 해체와 지양의 방향이 아니라 결국은 보완과 지지, 존속의 방향으로 기여하기 쉽다.....현재 우리의 삶이 뒤틀리게 된 원인을 (성장중독으로 나타나는) 자본의 가치생산 그 자체에서 찾지 않고, 대체로 그 (파괴적으로) 생산된 가치의 분배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213p
당시 가장 중요한 요구 중 하나가 '노동의 권리'였다. 노동과의 동일시가 이미 나타난 것이다. 이는 이미 공고히 뿌리내린 자본의 토대 '위'에서 모든 투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원래 외부에서 온, 적대적 원리로 인식되던 것들이 수백 년 간에 걸친 폭력적 과정의 결과로 마침내 사람들에게 '내면화'한 것이다. 그 원리가 곧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의 경쟁이다. 사람들이 경쟁을 내면화할수록 속물적으로 변해갔으며, 바로 이 때문에 현실의 근본 모순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눈을 잃어버렸다 – 225p
저자의 책을 읽다 보면 마지막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비록 연대의 힘과 노동사회에서의 탈피와 적정생산-적정소비-적정순환 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의가 필요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주목한 '중독사회' 개념은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된 성찰이 부족하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이 너무 '이상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현 사회에서 '현실적'이라 부르는 것들은 모두 기존 시스템의 지속화 내지 영속화에 불화하다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중독 시스템이 '치명적'이란 점, 그리고 중독행위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는 점을 정직하게 또 진지하게 인정한다면, 더 이상 그것을 수선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지는 '점진적' 변화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모두는 중독 시스템의 선진화 내지 합리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28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