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소파에 앉았다. 그는 30여 분간 집무실로 보이는 공간에 앉아서 신년사를 발표했다. 이는 주민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를 풍기는 행동으로 지난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총 6차례 신년사를 발표할 때 단상에 올랐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1일 오전 9시 <조선중앙 TV>로 공개한 김 위원장의 신년사는 등장부터 이전의 신년사 발표와는 확연히 다른 형식을 선보였다.
구성은 예년과 다르지 않다. 보통 신년사는 대내적으로 이룩한 성과를 평가하고 경제·정치 군사 등 부분별 과업을 제시한다. 이후 대남관계와 대외 관계를 언급하는 방식을 따른다. 이렇게 형식은 비슷하지만, 말투는 달라졌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이전에는 긴장을 고조시키고 투쟁으로 목표를 달성하자는 식의 표현을 사용했다"면서 "이번에 김 위원장은 내부결속을 강조하며 투쟁의 구호 등을 강조하지 않았다. 보다 긴장을 완화하며 포용적으로 말하는 분위기를 풍겼다"라고 짚었다.
신년사에서 비핵화 언급, 8년만
김 위원장은 이날 '비핵화'를 직접 언급했다. 그는 신년사의 대외 관계 부분에서 "조미 공동성명에서 천명한 대로 완전한 비핵화에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라고 밝혔다. 북측에서 매년 1월 1일 신년사를 발표하지만 '비핵화'를 언급한 건 지난 2011년 '조선반도 비핵화 입장·의지 불변) 이후 8년 만이다.
김 위원장의 대외정책은 북미 대화를 강조한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언제든 또다시 미국 대통령과 마주 앉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반드시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러한 북미정상회담 언급은 그동안 북측에 '북미 정상회담 개최 의사'를 밝힌 미국을 향한 답으로 풀이된다. 실무회담보다 양 정상 간의 만남, 이른바 '탑-다운' 방식으로 정체 국면을 헤쳐나가자는 뜻도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언제든지 2차 북미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실무협상보다 정상회담으로 현 상황을 풀어나가자고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 의지와 진정성도 재차 강조했다. 북측이 핵 개발보다 대량생산에 집중하고 있다는 미국의 일부 시각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비핵화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는 '핵 제조·핵 실험·핵 전파' 등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못 박았다.
다만 그는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일방적으로 할 때'라는 단서를 달며 '새로운 길'을 언급했다. 이때의 '새로운 길'이 경제·핵 병진노선으로의 복귀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조성렬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새로운 길이 병진노선으로 해석될 여지는 적다"면서 "외려 핵 개발을 하지 않지만 비핵화를 진전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른바 '불역진 비전진' 방식을 뜻할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미국이 상응조치를 하지 않고 제재로 압박했을 때,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 과정에 적극 동참할 수 없다는 점을 경고했다는 것. 홍민 실장 역시 "미국을 향한 메시지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절박함이 주를 이룬다"라면서 "새로운 길을 언급한 건 배수진을 친 것일 뿐"이라고 풀이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잘 풀어나가자는 식의 좋은 이야기를 다 하고 미국을 향해 마지막 쓴소리, 새로운 길을 언급한 점이 아쉽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재개?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를 두고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경이적인 성과들이 짧은 기간에 이룩했다"라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을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대가 없이 재개할 용의"를 밝혔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는 '9월 평양공동선언'에 명시된 내용이지만 북측이 조건이나 대가 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다.
이를 두고 정세현 전 장관은 "우리로서는 부담이 될 수 있는 이야기"라며 "남북철도 착공식 때 북측이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진행하자고 말했는데 우리로서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남측이 대북제재를 깨고 개성공단 재개나 금강산 관광을 진행할 경우 대외의존도가 높은 남측 경제 상황이 타격을 받는다는 것. 정 전 장관은 "비핵화 프로세스가 시작되면 치고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전에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북이 조건과 대가 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을 두고 제재와 관련 없이 진행할 수 있다고도 풀이했다. 금강산 관광의 경우 북이 별도의 비용을 받지 않고 문을 열어두면, 제재와 별도로 진행할 여지도 있다는 해석이다.
최용환 연구위원은 "한때 북측에서 개성공단 문을 남측이 일방적으로 닫은 것을 두고 피해보상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앞으로 이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라면서 "금강산 관광은 남측이 미국과 관련된 제재를 해소해달라는 의미로 보인다. 남측에 공을 넘긴 것"이라고 짚었다.
이번 대남 메시지의 또 다른 특징은 '다자협상'의 표현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은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보장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다자협상은 '중국'을 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평화체제를 남북미 외에 중국 등의 포괄적 참여로 이끌어가자는 뜻이다. 조성렬 전 연구위원은 "다자협상은 중국을 끌어들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라며 "종전선언의 표현이 사라진 대신 평화체제, 다자협상이 등장했다"라고 설명했다.
"군수공업, 농기계 생산으로"
한편, 북측이 대내적 메시지에서 강조한 '국방공업' 역시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날 김 위원장은 "국방공업의 주체화, 현대화"를 언급했는데, 지난해 신년사는 국방공업을 병진 노선과 엮어 발표했다. 전략무기와 무장장비들을 개발 생산해야 한다는 2018년 신년사와 달리 핵무기의 언급이 눈에 띄지 않은 것이다.
군수공업부문 역시 "여러가지 농기계와 건설기계를 생산해 인미생활 향상을 추동한다"라고 밝혔다. 이는 군수공업을 국방이나 핵이 아닌 경제를 위해 사용할 것이라는 의도를 분명히 한 것으로도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