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재가 낸 재판부 기피 신청 받아들인 대법원
벽두부터 재미있는 판결이 나왔다. 재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고, 또한 사법부의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는 조그마한 주춧돌 격인 판결이다.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지난 4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차녀와 이혼소송 중인 전 삼성전기 고문 임우재씨 측이 낸 재판부 기피신청을 기각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장충기와 강민구 부장판사와의 관계, 사건 당사자인 이부진씨가 삼성에서 차지하는 위치 등을 감안할 때 일반인의 시각에서 재판이 불공정할 수 있다는 의심을 할 수 있고 그 의심은 합리적"이라면서 "원심이 이를 간과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시했다.
사건의 전개 과정은 이렇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혼소송 중인 임 전 고문은 1심이 만족스럽지 못하게 끝나자 항소를 제기하였고, 위 항소심 재판은 서울고등법원 강민구 부장판사에게 배당되었다.
그러자 임우재 측은 강 부장판사가 부산지방법원 법원장으로 근무하던 시기에 삼성그룹 장충기 사장에게 사적인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서 친인척의 인사청탁을 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고, 그러한 태도는 삼성과 특수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므로 재판의 공정을 해할 우려가 있다면서 서울고법에 재판부 기피신청을 냈다.
그런데 서울고법은 임우재 측이 제시한 신청사유가 기피신청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고, 임우재 측은 민사소송법 제47조 제2항에 따라 대법원에 즉시 항고를 한 것이다.
판사가 보냈다고는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문자
그렇다면 강민구 부장판사는 왜 기피신청을 당한 것인가? 지난해 4월과 5월, <뉴스타파>는 '장충기 문자 대공개'라는 제목으로 강 부장판사와 장 전 사장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13건을 공개했다.
이들이 주고 받은 문자를 보면 강민구 판사는 여러차례 자신의 삼성제품 홍보활동을 알리거나 인사를 청탁하는 등 부적절한 내용의 문자를 장충기 사장에게 보냈다.
사실 판사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내용들이다. 판사가 청탁하는 것도, 특정 회사의 제품을 광고해 준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자세라면 다른 사람의 로비에 쉽게 흔들릴 수 있을 터인데 어느 누가 이런 판사의 판결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보도가 나왔다면 사실 여부를 밝힌 다음 곧바로 판사직을 사퇴했어야 한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상식수준이다. 그런데도 꿋꿋이 판사직을 유지하다가 기피신청을 당한 것이다.
매년 발표되는 사법연감을 보더라도 법관의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지는 예는 거의 없다. 그만큼 이례적인 것이고, 더욱이 고등법원에서 각하한 사건을 대법원에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며, 재판의 신뢰성 확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법관의 제척, 기피, 회피제도가 왜 필요한가? 공정한 재판을 위한 것이다. 재판의 핵심은 신뢰성 확보다. 당사자와 특수관계에 있는 사람의 재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민사소송법 제2절에서는 법관 등의 제척·기피·회피제도를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민사소송뿐만아니라 형사소송, 행정소송, 헌법소송 등의 재판은 물론 국가기관의 판단작용에는 일반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내용이다. 제척은 일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 당연히 재판에서 배제되는 규정으로 민사소송법 제41조에서 4가지 사유를 규정하고 있다.
1. 법관 또는 그 배우자나 배우자이었던 사람이 사건의 당사자가 되거나, 사건의 당사자와 공동권리자·공동의무자 또는 상환의무자의 관계에 있는 때
2. 법관이 당사자와 친족의 관계에 있거나 그러한 관계에 있었을 때
3. 법관이 사건에 관하여 증언이나 감정(鑑定)을 하였을 때
4. 법관이 사건당사자의 대리인이었거나 대리인이 된 때
5. 법관이 불복사건의 이전심급의 재판에 관여하였을 때. 다만, 다른 법원의 촉탁에 따라 그 직무를 수행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위와 같은 사유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당사자는 법관에게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때에는 기피신청을 할 수 있다(민사소송법 제43조 제1항). 다만 당사자가 법관을 기피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안에 관하여 변론하거나 변론준비기일에서 진술을 한 경우에는 기피신청을 하지 못한다(민사소송법 제43조 제2항). 그뿐만 아니라 법관 스스로도 제척 또는 기피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감독권이 있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 회피(回避)할 수 있다(민사소송법 제49조).
소송당사자인 이부진이나 임우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도 아닌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기피신청 대상 법관과 장충기의 관계, 원고와 장충기의 삼성그룹에서의 지위 및 두 사람 사이 밀접한 협력관계 등을 이 법리에 비춰보면 법관이 불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다는 의심을 할 만한 객관적인 사정이 있다"며 "이러한 의심이 단순한 주관적 우려나 추측을 넘어 합리적인 것이라 볼 여지가 있다"고 적절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재판의 공정성을 해할 우려가 있느냐는 일반 국민의 건전한 상식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
이 사건을 보면서 법관의 양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규정은 판사들이 전가의 보도로 삼고 있는 규정이다. 판결에 대한 비판이 있을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헌법에서 말하는 양심, 판사들의 주관적 양심 아니야
그러나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양심은 판사들의 주관적 양심이 아니다. 법조인 집단의 일반적 양심도 아니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건전한 상식에 기초한 객관적 양심이다.
강민구 부장판사는 처음부터 자신이 이 사건 맡기에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회피를 했어야 한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판사의 양심은 그런 것이다. 자신이 끝까지 붙들고 있다가 이러한 추태를 보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셈인가?
더욱이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지난해 10월 16일 법원 내부 게시판에 검찰의 밤샘수사 관행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전날 검찰에 출석해 이날 새벽 5시에 귀가한 지 약 4시간 뒤라 임 전 차장 등 법원에 대한 검찰 수사를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형사사건을 담당해 왔을 그가 밤샘 수사의 경우 증거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예가 있었던가? 일반 국민은 밤샘 수사를 받아도 되고, 법관은 밤샘 수사를 받지 않아야 된다는 말인가?
부적절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부끄러움이 없고, 사법농단 수사 과정에 있는 동료 법관을 이유 없이 감싸는 등 도대체가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강민구 부장판사는 이쯤 해서 판사직을 사퇴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하는 기회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