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 자녀 숙제부터 인건비 착취에 폭언·폭행 등 대학가에 만연한 교수 갑질 행태를 고발하는 '대학원생119'가 출범했다. 대학원생들 스스로 부당한 관행을 뿌리뽑겠다는 것이다.
직장갑질119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아래 대학원생노조)은 8일 전국 33만 명에 이르는 대학원생의 권리를 보호하는 대학원생119를 결성했다고 밝혔다.
대학원생119는 직장갑질119와 마찬가지로 네이버 밴드(https://band.us/band/73590805)를 통해 운영되며, 신정욱 대학원생노조 사무국장을 비롯해 하태승·김형규·이용우 변호사, 조영훈·최혜인 노무사 등 노동·법률 전문가들이 스태프로 활동한다.
"제자 인건비 착취, 자녀 숙제 동원 행태 15년 이상 지속"
그동안 직장갑질119와 대학원생 노조에 제보된 교수 갑질 행태를 보면,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10년에서 20년 넘게 지속된 사례도 있다.
한 대학교수는 자신이 지도하는 대학원생 10여 명의 개인 통장을 관리하며, 이들이 연구 프로젝트 등에 참여해 받은 연구비를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하는 형태로 인건비를 갈취했다. 한 대학원생은 3년 동안 3000여만 원을 빼앗겼고, 5년 동안 8000여만 원을 빼앗긴 졸업생도 있었다. 제보자는 이 같은 '연구비 강제 입금'이 적어도 20년 가까이 진행된 것으로 추정했다.
교수가 대학원생 제자를 자신의 자녀 과외나 학습 등에 사적으로 동원하는 행태도 여전했다. 한 교수는 자녀가 유치원에 다닐 때는 대학원생에게 자녀 등하교를 맡겼고, 초등학교에 진학하자 그림일기를, 중고등학교 때는 독후감을 쓰도록 했다고 한다. 동물실험 프로젝트에 대학원생을 동원해 논문을 쓰게 하고 마치 자신의 자녀가 참여한 것처럼 한 교수도 있었다. 심지어 자녀의 대학원 입학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를 제자에게 쓰게 하는가 하면, 자녀 대신 대학 봉사활동으로 책 한 권 타이핑을 시키는 교수도 있었다.
교수의 제자 폭언과 모욕, 인격 모독은 일상화해 있고 심한 경우 제자가 우울증에 걸려 정신과 진료를 받은 사례도 있었다. 한 지도교수는 학생의 발제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소리를 치며 유인물을 찢거나, 학생 앞에서 책을 바닥에 던지기도 했다. 또 주말에 지도교수의 사적인 동호회 행사에 대학원생을 동원해 종일 잡일을 시키고도 돈 한 푼 주지 않는 등 노동력 착취나 '열정페이' 강요 문제도 심각했다.
<오마이뉴스>가 지난 2002년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겪는 교수 갑질 행태를 고발했을 때도 인건비 횡령, 자녀 과외 등 노동력 착취가 심각했는데, 20년 가까이 되도록 교수 갑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관련 기사:
'카드깡'에 교수자녀 과외 · 숙제까지, 도제식 상명하복 문화로 연구는 '뒷전' ).
그럼에도 교수 갑질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건 대학원의 도제식 문화 탓에 대학원생들이 문제 제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직장갑질119는 "대학원생들은 교수에게 찍히면 10년 이상 공부가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실제 한 대학원생은 대학 인권센터에 대학원생 인권문제를 단순 문의했다가 실명이 지도교수에게 노출된 뒤,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각종 연구 과제에서 배제당하고 논문 지도를 거부당하는 등 '보복'을 당했다고 제보했다.
직장갑질119는 "제보된 연구비 갈취-자녀숙제 갑질 교수의 비위 행위는 최소 15년 이상 계속되어 왔지만 학교와 교육 당국은 갑질과 비리 문제를 방치해 왔다"면서 "대학교수가 진학, 학위, 진로 등 대학원의 인생을 결정할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비리 제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대학원생 노조 "제도적 변화 이끌 것"
대학원생들이 지난해 2월 노조를 만든 데 이어 직장갑질119, 전문가들과 힘을 합쳐 대학원생119를 만든 것도 뿌리 깊은 교수 갑질과 대학원생 노동력 착취 행태를 근본적으로 막을 제도적 대안을 만들겠다는 이유다.
신정욱 대학원생노조 사무국장은 "그동안 노조에서 개별 사례에 대응했지만 개인적인 구제에만 머무는 한계가 있었다"면서 "대학원생119를 통해 모은 사례들을 유형화해 집단적 사례로 부각시키면 문제를 해결하고 제도적 변화를 이끄는 데도 유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학원생 노조는 그간 성균관대 조교 집단 해고 사태를 막고 대학 내 '미투' 피해자를 돕는 한편, 교원 징계 시효를 3년에서 5년으로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나름 성과를 거뒀다. 현재 노조 조합원도 전국 30여 개 대학원 200명에 이른다.
신정욱 사무국장은 "그동안 전문적 상담 능력이 없었는데 법률 전문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참여해 전문성을 갖추고 대응할 수 있게 됐다"면서 "대학원생들이 개별적으로 약하지만 다 같이 뭉치면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줘 장기적으로 다같이 모여 (대학원생 권리 찾기의) 주체로 활동할 수 있길 바란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