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의 하나로 지도층 인사들의 언행불일치를 드는 사람이 많다. 말은 '요(堯)'처럼 하면서 행동은 '도척(盜拓)'을 방불케 한다는 점이다. 요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성군, 도척은 공자 시대 도적 무리의 수괴를 일컫는다. 정치인ㆍ언론인ㆍ종교인ㆍ재벌ㆍ문화계의 내로라하는 작자들의 언행이중성을 보면 실망을 넘어 분노케 한다.
그래서 어떤 분은 대한민국 엘리트의 능력과 도덕성이 일치가 될 때 민주공화국이 제대로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말 따로 행동 따로를 밥 먹듯이 하면서, 시민들은 감쪽같이 속거나 더러는 알면서도 공범의식에서 뽑아주고 덮어준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출세자들의 모습(방법)을 따르려 든다. 그것이 빠르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그리고 그 아류들이 집권하면서 보여준, 변칙과 탈선의 행태이다.
광란의 시대에도 정도를 당당하게 걷는 분들도 없지 않았다. 장일순도 그중의 한 분이다.
'수심청정(守心淸淨)'이란 글씨를 자주 썼다.
"맑은 심성을 지니고 착하게 살라"는 뜻이다. 착하게 살려면 맑은 심성을 지녀야 한다. 도척의 마음을 갖고 요처럼 행동하기란 불가능하다.
장일순은 일체의 삿(邪) 됨과 속(俗) 됨이 없는 품격 있는 생각과 행동을 하고자 하였다. 세속에 살면서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는 궁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비어 있는 사람 같았다. 기교를 모르고 어리숙하지만 진정성이 있고, 신분을 뛰어넘어 사람들과 사귀었다. 그가 태어난 시기, 그러니까 일제말기부터 이승만~노태우로 이어지는 야만성이 짙은 한국사회에서 지명도 있는 사람이 품격을 지키며 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장일순이 오염되지 않는 정신과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과 행동거지의 준거는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큰 줄기의 밑둥은 해월의 사상과 노자의 사유가 아닐까 싶다. 장일순은 노자를 유독 좋아하고 그를 닮고자 하였다.
돌이켜 보면 속물들이 주류가 되던 시절에 장일순은 인품이 속되지 않고 고아한 자세로 살았다. 행동이 형식적인 인습의 굴레에서 얽매이지 않고 활달 무애하였다. 일반적으로 유교를 중정지도(中正之道), 불교를 원명지도(圓明之道), 도교를 현허지도(玄虛之道), 풍류도를 현묘지도(玄妙之道)라 하는데, 장일순은 도교와 풍류도 쪽에 가깝다.
노자를 좋아하고 그의 저술 『도덕경』은 늘 착상머리에 놓여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 고현(苦懸) 여향(厲鄕)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李) 씨이고,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라 하였다. 주(周) 왕실의 수장실(守藏室)의 사(史)를 지냈다고 한다. '사'는 주나라 천자의 궁전 안에 있는 장서실의 책임자를 말한다.
우리 나라에는 오래 전부터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하는 노장사상ㆍ노장철학이 들어왔다. 하지만 조선왕조 500년 간 공자의 유교사상이 중심이 되면서 노장사상은 아웃사이드의 처지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과 습성 속에는 노자의 사상이 살아 있다.
"지금도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삶을 즐기는 사람들의 흐뭇한 광경에서, 또는 각박한 세파 속에서도 자기 분수를 알고 여유 있는 태도를 취하는 의젓한 사람에게서 또는 온갖 불행의 도전에 조금도 굴하는 법 없이 초연한 모습으로 자기소임을 다하는 사람에게서 늘 노자의 도가적 낌새를 느낀다. 그만큼 노자는 동양인의 생활 속에 또는 동양의 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주석 1)
그중의 하나가 장일순이었다.
속물의 시대에 구원을 찾던 장일순이 노자를 놓칠 리 없었다. 노자의 사상은 그의 생활철학이 되고 마음의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 각박한 세태, 속물의 시대에도 청아한 마음과 청초한 생활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노자의 영향이 컸다.
주석
1> 김학주,『노자의 도가사상』, 3쪽, 명문당, 1998.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