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법원이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지원배제명단(문화계 블랙리스트)'에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한 가운데, 정부가 항소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가 항소에 나설 경우 '국정농단' 핵심 사건에 국가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블랙리스트 관련 피의자들이 유죄를 선고받고,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사과했다는 점에서 항소하지 않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특히 앞서 문재인 대통령의 '국가가 소송에 패소할 경우 항소를 자제하라'는 지시도 고려될 것으로 보인다.
"예술적 결사의 자유 침해받는 손해 입었다"
청주지방법원 민사12부(부장판사 오기두)는 지난 24일 충북민예총·예술공장두레와 지역 예술인 25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단체 2곳과 개인 2명에게 각 2천만 원, 나머지에는 각 1천 500만 원씩 총 4억 2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블랙리스트 피해에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재판부는 우선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된 행위가 위법하다고 인정했다. 손해배상 책임에는 그 행위의 '위법성'이 전제된다. 재판부는 "블랙리스트 작성 행위가 헌법적으로 정당화되는 기본권 제한 사유인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라는 목적에 봉사하는 행위라고 볼 여지는 전혀 없다"라며 "(피고가) 입증할 증거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민사소송법에 따라 원고들이 피해를 본 '무형의 손해'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지원배제 행위로 인해 수량적으로 산정할 수 없으나 예술 활동을 위한 목적사업수행에 제약을 받음으로 인해 예술가들의 예술적 결사의 자유를 침해받는 손해를 입었다"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 기조에 따라 '좌파'로 분류된 원고들이 창작지원금을 받지 못하거나 지원예산이 삭감된 부분도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이 인정됐다. 재판부는 "행정부처에서 보조금 등을 지원하지 않는 경우 개인이나 단체에 아주 강력한 제재수단이 되므로 자기검열 하에 예술적인 표현 등을 자제하게 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원고들은 2017년 2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로 지역 예술가들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탄압받고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다"며 각 2천만 원씩 총 5억 6천만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정부 패소' 항소 자제
박근혜 정부는 2014~2016년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지지 선언을 하거나 세월호 시국선언 등을 했다는 이유로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지원에서 배제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앞서 김 전 실장,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등의 형사재판에서도 2심까지 유죄를 인정받았다. 최근 도종환 문체부 장관 또한 2019년 신년사를 통해 "사과하고 사과해서라도 국민과 예술인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법무부는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국민을 상대로 한 국가의 항소권리를 남용하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국가가 패소한 주요 사건에 항소를 포기해왔다. 법원이 지난해 8월 세월호 참사, 지난해 12월 박정희 정권 시절 일어난 '민청학련 피해자'의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들이 그 예다.
법무부는 블랙리스트 국가책임 배상 인정 판결 항소 여부와 관련해 "아직 결정된 바 없다. 항소 기간이 남았고, 추후 재판 진행에 영향을 줄 수 있어 논의 내용을 전달하기 어렵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