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ㆍ1혁명이 전개되면서 심산 김창숙과 한국 유교계는 깊은 고뇌와 시름에 빠졌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민족 대표로서 3ㆍ1 혁명을 주도한 데 비해 유림만은 여기에서 빠져, 결과적으로 유교계가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개신유교의 지도자 심산 김창숙의 아픔은 남달랐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19년 2월 김창숙은 지기인 벽서 성태영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는 "광무 황제의 인산을 3월 2일에 거행하는데 국내 인사가 모 사건을 그때에 거행할 작정이다. 사기(事機)가 이미 성숙했으니 자네도 즉일로 서울에 와서, 시기를 놓쳐 미치지 못하는 후회를 남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김창숙의 어머니가 병환 중이어서 쉽게 곁을 떠나지 못하다가 2월 그믐께에 이르러 서울에 올라오니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는 이미 선정된 연후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민족대표로 참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다.
김창숙은 3ㆍ1 독립선언서를 읽으면서 통탄하였다.
"우리 조선은 즉 유교의 나라이다. 진실로 나라가 망한 원인을 궁구한다면 바로 이 유교가 먼저 망하자 나라도 따라 망한 것이다. 지금 광복운동을 인도하는 데에 오직 세 교파가 주장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세상에 유교를 꾸짖는 자는 '쓸데없는 유사(儒士), 썩은 유사와는 더불어 일하기에 부족하다' 할 것이다. 우리들이 이런 나쁜 명목을 덮어썼으니 무엇이 이보다 더 부끄럽겠는가?"
이런 연유로 해서 김창숙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파리장서(巴里長書) 사건' 또는 '유림단 사건' 등으로 불리는 항일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ㆍ1혁명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내기로 하였다. 의병운동을 주도한 호서 지방의 유림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과 각지에서 의병에 참여했던 김덕진ㆍ안병찬ㆍ김봉제ㆍ임한주ㆍ전양진ㆍ최중식 등이 중심이었다.
이러한 호서지방 유림의 동태를 모르고 있던 김창숙은 영남 유림을 중심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로 하고, 우선 이 지방 유림의 상징적 인물인 면우 곽종석을 찾아 상의하여 거사를 도모하였다.
그러다 호서와 영남 두 지방의 유림이 같은 목적의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각자 준비해 온 두 팀은 서로 통합하기로 합의하고, '파리장서'에 담을 내용은 김창숙이 준비한 것을 택하기로 하였다.
곽종석ㆍ김창숙ㆍ김복한ㆍ김덕진ㆍ안병찬 등 134명의 유림 대표가 서명한 '파리장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천지 자연의 법칙 속에 모든 인류는 제 나름의 삶의 양식이 있다. 특히 여러 나라, 여러 겨레는 제각기 전통과 습속이 있어 남에게 복종이나 동화를 강요받을 수 없다.…… 우리 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3천 리 강토와 2천만 인구로서 4천 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스스로의 정치의 원리와 필요한 능력은 갖추어 있다. 일본의 간섭은 전혀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일본이 가한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제 거족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맨주먹으로 일제의 총칼과 싸우고 있다.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때에 우리는 희망에 부풀었고, 폴란드 및 그 밖의 나라들이 독립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더욱 고무되었다.…… 만국평화회의는 우리 2천만 생명의 처지를 통찰해 줄 것을 믿는다.
'파리장서'를 휴대한 김창숙은 단신으로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이시영ㆍ조성환ㆍ이동휘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나, 국내 유림 세력의 뜻을 전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였다.
그런데 일이 다소 꼬여들었다. 이미 7~8일 전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선정된 김규식이 독립 운동 단체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경비 문제도 있고, 거기다 외국어를 모르는 김창숙이 혼자서 파리에 가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다시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의논한 결과, '파리장서'를 각국 언어로 번역하여 파리의 김규식을 통해 만국평화회의에 전달하기로 하고, 국내의 각계에도 이를 발송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국내에 발송된 '파리장서'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곽종석 이하 대다수의 유림들이 피체되었으며, 일부 인사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곽종석ㆍ김복한ㆍ하용제 등이 감옥에서 순국하고, 다른 많은 관련자들이 일경의 잔혹한 고문으로 죽거나 처형당하였다.
김창숙은 독립군 기지 마련을 위해 멀리 내몽고에 3만 정보의 개간 가능한 땅을 확보하게 되었지만 적지 않은 이주비용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모두 비슷한 망명가의 처지에서 그만한 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동지들과 여러 날 의논하였지만 뾰족한 방도가 나오지 않았다. 국내로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알리고자 했지만 역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국내에서 곽종석 선생의 문집 간행 관계로 서울에 많은 유림 인사들이 모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심산은 이를 좋은 기회라 여기고 직접 국내에 들어가기로 작정하였다. 심산이 국내에 잠입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었다. 일제는 파리장서사건의 '주모자'로 단정하고 심산의 행방을 쫒고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개간지를 확보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위험 앞에 몸을 사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심산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기에 험난을 무릅쓰고 직접 가서 황무지 개간 자금을 모아오기로 결심하였다.
심산이 귀국을 결심하면서 동지 송영우ㆍ이봉노ㆍ김화식의 동조를 얻게 되어 매일 이들과 거사를 논의하였다. 거사를 준비하면서 신채호에게만 알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극비로 하였다. 떠날 때에도 동지들에게는 만주 등지에 볼 일이 있어서 떠난 것으로 둘러댔다.
1925년 8월초 심산은 북경을 출발하여 국내 잠입 길에 올랐다. 길림성 하얼빈에서 10여일 머물면서 만주 각지 동포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안동현과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금을 모으려 노력했지만 모금이 쉽지 않았다. 국내의 분위기는 3․1혁명의 열기가 크게 수그러든데다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독립성금을 내려는 독지가도 줄어들었다.
심산은 서울에서 하장환ㆍ정수기ㆍ이태호ㆍ곽윤ㆍ김창백ㆍ송영우ㆍ김화식을 만나고 이들 중 몇 사람을 곽종석 문집 집간소로 보내 곽윤과 김황을 오게 하거나 경기도ㆍ충청남북도ㆍ경상남북도ㆍ전라남북도 등지로 파견하여 재산가들에게 그의 뜻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서 김화식을 경주에 보내어 오랜 지기 정수기와 허장환을 상경케 하여 그들을 봉화ㆍ진주ㆍ함안 등지로 보내어 독립자금을 모아오도록 하였다. 이때 진주의 한 부호가 허장환을 통해 심산에게 귀순할 것을 종용했다는 말을 듣고 "친일부자의 머리를 독립문에 걸지 아니하면 우리 한국이 독립할 날이 없을 것이다."라고 개탄하면서, 서울에서 새로운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1925년 9월 2일(음) 서울 낙원동 134번지 평양옥이라는 임시 숙소에서 신건동맹단을 조직하여 독립자금 모금과 친일부호의 척결을 도모하였다. 김화식ㆍ송영우ㆍ곽윤ㆍ손후익ㆍ하장환ㆍ이자근 등이 참여하여 조직한 신건동맹단은 다음과 같은 내규를 만들었다.
① 단명은 신건동맹단으로 할 것.
② 인원을 2개 반으로 나누어 모험단과 모집단으로 할 것
③ 모집단은 각자 담당구역을 정하고 그 구역내 부호에게 군자금으로 1개소에 1천원 이상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 시에는 모험단이 와서 살해할 것이라고 협박할 것.
④ 모험단은 권총을 휴대하여 모집단의 요구에 불응하는 부호에게 가서 직접 행동에 옮길 것.
⑤ 담당구역은 각자가 뜻하는 장소를 선택할 것.
⑥ 아직 연락을 취하지 못한 유림단에게는 김창숙이 수시로 소식을 전달토록 할 것.
⑦ 단원 중 김화식ㆍ송영우ㆍ정수기를 모험단원으로 하고, 기타는 모집단원으로 할 것.
신건동맹단의 총책임은 심산, 김화식과 송영우가 부책임을 맡고 단원들이 각기 지방의 군자금 모금 책임을 맡아 활동에 나섰다. 활동 방법도 구체적으로 마련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