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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 연합뉴스

여는 글

그간 로스쿨 측에선 낮은 합격률과 횟수 제한이 없이 응시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사법시험은 인력의 효율적 배분을 해치고, 시험 낭인을 양산하는 제도라고 비판해왔다. 그리고 로스쿨은 합격률 보장과 오탈제도를 통해 시험 낭인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우리 사시생들은 로스쿨과 오탈제도가 공통분모로 삼고 있는 "인력의 효율적 배분", "시험 낭인 방지"와 같은 이념을 내세워 기본권이 침해되는 상황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우리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1. 인력의 효율적 배분, 전체주의

인력의 효율적 배분은 국민을 국가의 구성요소, 즉 국가의 인력으로 보는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은 국가의 인력이기 이전에 기본권의 주체이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을 통제하고 기본권을 제한하는 '통치자'이기에 앞서 국민을 보호하고 기본권을 보장해 줄 헌법적 의무를 진다. 국가는 '기본권의 수호자'라는 점에 그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 이념이다.

헌법 제10조 후문에서도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인력의 효율적 배분'과 같은 이념을 들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우리 헌법이 채택하고 있는 근본 이념에 배치되는 것이다.

물론 기본권은 헌법 37조 2항에 따라 국가 안전보장, 사회질서, 공공복리를 위해 과잉금지 원칙에 따라 제한할 수 있으며 인력의 효율적 배분이나 시험 낭인 방지를 공공복리에 포함시켜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특정한 정책 목표를 상정해놓고 공공복리라는 이념을 들이대며 적극적인 방향으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에는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공익"이 아니라 "국가가 원하는 공익"을 강요하는 폐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적극적인 방향이란 국가가 특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하는 적극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인력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로스쿨의 정원을 통제하면서 변시 합격률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횟수를 제한하는 등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2. 시험 낭인, 국친주의

'시험 낭인'을 방지한다는 공익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헌법은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권과 누구나 자유로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개척할 수 있는 자기운명결정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우리는 장수생으로 사는 것은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통해 보장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들을 시험 낭인으로 보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려 함이 아니다. 인생을 소모하며 국력을 갈아먹는 낭인으로 보든 자기운명결정권의 발현 형태로 보든 이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향유하는 각자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즉 어떠한 인생을 살 것인지 계획하고 결정하는 것도, 또 그런 인생을 두고 낭인이라 손가락질할 것인지도 전적으로 개인에게 일임된 것이지 국가가 칼로 두부 베듯 기준선을 그어 정해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장수생의 삶을 두고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은 바람직한 인생이라 이야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장수생을 "낭인"이라 여기는 '사회적인 평가'가 존재하리라는 점도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이러한 사회적 평가에 기대어 "수험생으로 몇 년 이상을 보내는 것은 사회적으로 유해한 인생"이라는 '규범적인 평가'를 내리고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기본권 보장의 '의무자'인 국가가 기본권의 주체인 '권리자'에게 "어떠한 방향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권리자 자신에게도 해로우니 이를 금한다"며 간섭하는 것은 국민을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소위 '국친주의'에 입각한 사고방식이다. 국가가 원하는 인생관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전형적인 예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는 '인력의 효율적 배분'이나 '낭인 방지'가 헌법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 역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익임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위와 같은 공익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국가가 개입하는 방향과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공익과 사익이 서로 조화점을 찾을 수 있는 다른 수단은 없는지 진지한 고민은 해보지도 않고 기본권의 제한부터 고려하려고 있는 점. 그리고 전체주의에나 어울릴 법한 이념을 끌어다 기본권 제한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쓰고 있는 태도가 헌법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아무런 경제활동 없이 장기간 수험에만 매달리는 현상은 시험 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영하거나 법조인이 되는 경로를 여러 가지로 분산함으로써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 예컨대 일정 기간 법률 직군에 종사하면 1차 시험을 면제해주던가 아니면 변협에서 주관하는 소정의 연수를 거쳐 변호사 자격증을 발급해주거나 혹은 검찰이나 법원 공무원들 중에서 판검사로 임용하는 방법도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법학 석사학위를 받으면 시험에서 해당 전공과목은 면제해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수험생들을 기타 직군이나 대학원으로 유도함으로써 일과 수험을 병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사법시험에서 유독 장수생이 나왔던 이유는 공부해야 할 법률 지식의 방대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법조계로 진입하는 통로를 시험 합격이라는 단 한 가지 길만 고집하며 '다 때려치고 공부만 하던가 공부를 아예 접던가' 하는 일도양단식 선택을 강요하는 단선적인 시스템도 한몫한다.

그런데 현행 제도 역시 로스쿨 졸업, 변호사시험 합격이라는 한 가지 통로만 두고 다른 진입로는 원천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법시험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위와 같이 보충적인 수단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막연히 입학 정원을 제한하고, 합격률을 인위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시험 응시를 막아 낭인을 없애겠다는 발상은 기본권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국가의 사명을 망각한 것이다.

3. 기본권의 양면성, 국가의 조정과 개입

그러나 우리는 기본권 보장을 위해 응시를 무제한 허용하여야만 한다고 보지는 않으며 따라서 응시 기회를 제한하는 것 자체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본권의 양면성에 비추어 보면 응시 기회를 적정하게 제한하는 것이 모든 국민들의 기본권을 균등하게 보장하는 데에 꼭 필요한 요소일 수 있다고 본다.

기본권은 주관적 공권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가치질서를 형성하는 지침이 된다. 이러한 기본권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것은 현대국가의 보편적인 헌법 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타인의 기본권에 대한 존중이 곧 자신의 기본권의 행사의 기초가 되고 기본권의 행사는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된다.

이러한 기본권의 내재적 한계는 우리 헌법 21조 4항에서도 간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기본권 보장 의무는 위헌적인 공권력 행사로부터 기본권을 보호해주겠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체 사회 구성원들이 헌법의 테두리 내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기본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개입하고 조정할 의무까지도 포괄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 헌법은 제9장 경제에 관한 장에서 자원의 개발과 관리에 대한 국가의 의무와 권한을 규정하고 있다. 현 세대는 자연을 이용,개량할 권리가 있지만 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정되는 것이고 이러한 내재적 한계로 인해 현 세대는 미래 세대를 위해 자연을 보호하고 적절하게 관리할 의무도 부담하게 된다.

국가가 보호해야할 국민에는 현세대는 물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 세대까지도 포함된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국가는 현세대의 기본권 행사가 미래 세대에 대한 부당한 침해가 되지 않도록 조정할 권한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만약 시험 응시가 무제한 허용된다면 탈락자들이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수험 시장은 과열되고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기 마련이다. 이는 곧 후진입자의 경우 선진입자들보다 더 두터운 경쟁의 벽을 뚫어야함을 뜻하는 것이고 선진입자들의 무제한적인 기본권 행사는 후진입자들의 권리 즉 선진입자들과 비슷한 경쟁률, 난이도로 적정한 경쟁을 가질 권리의 침해로 연결됨을 뜻한다.

따라서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적정한 선에서 제한하는 것은 선진입자와 후진입자간의 균등한 기본권 행사를 보장하기 위한 조정이며 '모든' 국민의 기본권이 충실히 보장되도록 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국가의 조정적 기능은 후진입자들의 경우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옹호해 줄 대리인의 지위를 국가에 의탁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중요성을 가진다. 가령 9년 전 변시 합격률을 "입학 정원 대비 75%"로 정했을 때 이미 후진입자들의 적정한 경쟁을 가질 권리를 침해할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고, 반토막난 작금의 변시 합격률은 내재된 위험이 현실화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후진입자들이 9년 전으로 돌아가 이러한 상황을 예정하여 헌법소원을 낼 것을 기대하기도 힘들고, 냈다고 해도 자기관련성이 없어 각하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물론 선진입자와 후진입자간의 기본권 충돌을 조정하는 국가의 활동은 기본권의 부당한 침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형량의 원리를 엄격히 준수하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도 헌법 37조 2항이 일응의 기준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응시 기회를 모두 소진한 선진입자들이 재차 '후진입자'의 지위를 취득할 수 있는 대안을 열어준다던가 (일본이 이러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혹은 일정 기간 법률관련 직종에 종사하면 소정의 연수를 받아 변호사가 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준다던가 하는 등의 다각적인 통로를 열어주어 기본권 침해로 연결되지 않도록 적절한 수단을 동원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엔 변호사가 되는 통로를 오로지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시험 합격'이라는 지극히 단선적인 통로만을 두고 있어 변시 응시 제한이 "평생 응시 금지"라는 가혹한 결과로 연결된 것이다.

4. 오탈제도의 위헌성

한편 오탈제도는 높은 합격률을 전제로 한 것이며 합격률이 점점 내려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당성이 유지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이 주장은 합격률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된다면 오탈제도의 정당성을 수긍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합격률이 높아 응시 제한에 걸리는 사람의 수가 매우 적다면 이를 두고 지나치게 가혹한 제도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낮은 합격률을 전제로 응시 제한을 하게 되면 여기에 걸리는 사람의 수는 많아질 것이고 이를 두고 바람직한 제도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즉 어떤 제도에 의해 기본권이 제한되는 사람의 숫자가 많고 적음은 그 제도가 헌법적으로 정당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데에 고려해야 할 한 가지 징표가 됨은 물론이다. 그리고 응시 제한에 걸리는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기본권의 제한을 완화해줄 다른 보충적인 수단을 두어야 할 필요성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탈제도의 위헌성은 이러한 '제도적 관점'이 아니라 응시 제한 규정이 각 개인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법률효과로 나타난다는 점에 있다. 즉 응시 제한이 '평생 금지'라는 기본권의 완전한 형해화로 연결된다는 점에 위헌성이 있는 것이고 이러한 법률효과는 해당 규정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의 숫자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오탈자가 단 한 명에 불과하더라도 직업 선택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해버리는 상황은 여전히 위헌인 것이지 오탈자의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정당성 판단이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변시 응시를 제한하는 제도 자체를 위헌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응시 제한을 해제함으로써 위헌성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응시 기회를 제한하여야 할 필요성은 수긍할 수 있으나 현행 오탈제도는 응시 제한을 넘어 완전한 박탈을 강요한다는 점에 위헌성이 있다.

그리고 응시 횟수 제한이 평생 응시 금지라는 법률 효과로 직결된 이유는 제한을 완화해줄 보충적인 수단을 아무것도 구비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오탈제도는 높은 합격률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변시 응시가 제한된 이후에도 법조인이 될 수 있는 다른 대안적인 수단을 두고 있을 것을 전제로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5. 로스쿨과 오탈제도

우리나라는 입학 정원을 2천 명으로 엄격히 제한하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에게는 인위적으로 합격률을 보장해주고 로스쿨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법조인이 되는 길을 원천봉쇄해놓는 형태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시스템은 그저 이름만 로스쿨로 바꿔 단 개악된 사법시험체제일 뿐 본래적 의미의 로스쿨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을 본고장으로 하는 로스쿨은 법조 구성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제도이다. 다양성은 개방성과 다각화를 전제로 한다. 즉 로스쿨로 들어가는 문이 넓을수록, 법조계로 진입하는 통로가 많을수록 다양성은 증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로스쿨과 우회로를 두고 있는 것이고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몇 명이나 뽑을지는 로스쿨의 자유로운 판단에 일임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가 인위적으로 정원을 통제하는 것은 상정하기도 어려우며 합격률을 인위적으로 보장해준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본래적 의미의 로스쿨은 각 학교별로 다양한 학제와 커리큘럼, 장학제도를 두어 우수한 인재들을 모으고 합격률을 높이기 위한 경쟁을 통해 발전한다는 점을 기본 틀로 한다. 미국이 그렇고 일본도 기본적인 틀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경우처럼 국가가 입학 정원을 통제한다는 발상은 로스쿨의 설립과 운영의 자유를 핵심 축으로 하는 로스쿨의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이며 합격률 보장을 통해 교육 내실을 기하겠다는 것은 법조인 양성을 위해 로스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로스쿨을 유지하기 위한 법조인 양성을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도 한참 뒤바뀐 것이다.

이렇게 로스쿨의 총 정원을 제한하면서 변시 합격률을 인위적으로 보장해주는, 이름만 로스쿨일 뿐 전혀 로스쿨스럽지 않은 기만적인 제도는 실로 막대한 폐해를 낳았다. 법조인이 되는 첫 관문을 로스쿨과 교수들에게 백지위임한 결과 법조인이 될 기회를 지원자의 사회적 배경에 따라 차등적으로 배분하는 위헌적인 상황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명문대 출신일수록, 나이가 어릴수록 보다 많은 기회를 보장받는 잘못된 풍토를 가져왔고 이는 '명문대 입학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고착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입학에서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광범위하게 개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대륙법계를 따르는 우리나라에서 3년 만에 이론과 실무를 겸한 교육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철저한 검증도 없이 로스쿨의 조속한 안정화라는 명목으로 합격률 보장이라는 인위적인 장치를 만들어 로스쿨의 부실한 교육 수준을 은폐하는 도구로 악용하고 있다.

교육 내실을 기하기 위해선 높은 합격률 보장이 필수적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변시에 합격하기 위해 허수 없는 경쟁을 거친 결과 이제는 사시합격자들에 필적할 정도로 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우리의 로스쿨은 철저하게 로스쿨 교수들의 시각에서 로스쿨의 안정화에만 초점을 두고 설계되었다. 도입 초기 로스쿨생들의 사시 응시를 막은 것, 예비 시험을 두지 않는 것도 그렇고 오탈제도 역시 이러한 편향된 설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응시 제한으로 인한 기본권 침해를 완화해줄 아무런 보완책도 두지 않은 것은 단순히 입학정원 대비 75%의 합격률을 보장해주고 5번의 기회를 주면 오탈자는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허접한 생각에 기댄 것이거나 혹은 어차피 오탈자는 소수에 불과할테니 평생 응시가 금지되든 말든 관심이 없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 역시 로스쿨을 둘러싼 여러 결정에서 오로지 로스쿨의 안정화만을 핵심 가치로 놓고 판단하고 있으며, 오탈제도를 합헌이라 판단한 2016.9.29.2015헌마47에서도 여전히 같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사시생들은 오탈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변호사시험법 제7조의 위헌성에는 공감하지만 그 이유와 해결책에 대해선 그대들과 입장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밖에서 바라 본 로스쿨의 풍경과 그 속에 들어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며 바라보는 풍경이 같을 수는 없다.

어쩌면 로스쿨 밖에서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시생들과 달리 그대들은 직접 로스쿨을 경험했고 더 자세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숲에 들어가면 나무는 잘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숲 전체의 모습을 알기는 힘들다. 안에서 보는 시각과 밖에서 보는 시각 모두 존중하자는 이야기일 뿐 어느 쪽이 더 올바른가를 따지고자 함이 아니다.

맺는 말

로스쿨과 사법시험, 이런 걸 다 떠나서 우리는 같은 꿈을 가지고 법학을 공부했으며 수험생활의 고단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나도 인정받으며 살고 싶다'는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생활인이기도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저마다의 정의를 품고 사는 법률가이기도 하다. 무릇 법률가는 법률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의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는 격언은 그대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현재 존재하는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이비 법률가'가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할 법의 모습을 그리며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는 '참다운 법률가'의 모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비록 바라보는 관점은 다를지라도) 우리는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우리는 자신의 정당한 이익을 주장하고 옹호할 권리가 있지만 후손들에게 보다 정의로운 제도를 물려주기 위해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울 의무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로스쿨 제도가 현행대로 유지되는 한 영영 법조인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설사 법조인이 못된다하더라도 (되면 더 좋겠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쓰린 아픔이, 그리고 부당한 현실에 맞서려는 노력이 더 좋은 향기를 품은 사람으로 성장시켜주는 밑거름이 되리라 소망한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그대들을 응원한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사시존치네트워크 사무국장입니다.


#로스쿨#변호사시험#사법시험#오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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