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
성균관(成均館)의 역사는 고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298년 고려 충렬왕은 최고 교육기관 국자감(國子監) 이름을 성균감(成均監)으로 바꿨다. 성균감이라는 이름은 1308년 성균관으로 다시 바뀐다. 고구려의 태학과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으로 이어진 국가 최고 교육기관 역사에 성균관이 이름을 올린 건 이때부터다.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 송도(지금의 개성)에는 지금도 성균관 건물이 남아 있다. 개성 성균관 건물은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걸로 알려져 있으며, 왕건릉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성균관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쓰였다. 1398년 7월 성균관은 조선의 새 도읍 한양 숭교방(지금의 명륜동)에 대성전과 명륜당 같은 건물을 세웠다. 고려에 이어 조선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위상도 이어갔다. 대학로로 유명한 동숭동(東崇洞)은 숭교방의 동쪽 동네라는 뜻인데, 조선시대 때부터 이 일대는 '대학가'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조선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어땠을까. 조선의 과거 시험은 대과와 소과로 나뉘는데, 성균관은 과거 1차 시험이라 할 수 있는 소과, 즉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에게 입학 자격을 부여했다. 물론 입학시험을 따로 치거나 음서제를 통해서도 입학할 수 있었다.
성균관에 입학했다고 과거 시험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출석 점수 원점이 300점을 넘어야 대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다. 출석 원점은 성균관 식당에 비치된 명부에 아침저녁마다 점을 표시하도록 했고, 아침과 저녁 식사 두 번 표시해야 원점 1점이 되었다. 실력이 뛰어난 신입생일지라도 일년 가까이 성균관 생활을 거쳐야 과거 응시가 가능했다.
학비와 숙식비, 학용품비는 모두 국가에서 부담했다. 학생 입장에서는 전액 무료였다. 중도 자퇴하는 학생에게만 재학 기간 학비와 숙식비를 추징했다. 사교육비 부담이 큰 오늘날 관점으로 봐도 국가가 인재 양성 비용을 전액 부담한 조선의 교육관은 새롭다.
그러면 성균관 졸업 자격은 어땠을까? 과거 시험에 최종 합격해야 성균관을 졸업할 수 있었다. 과거 합격자가 나오지 않으면 성균관 정원에 여유가 생기지 않아 성균관에 입학하고 싶은 사람도 들어가기 어려웠다. 성균관 학생 정원은 초기 150명에서 나중엔 200명으로 늘었지만 성균관 유생의 과거 합격율이 높지 않으면 성균관 입학율도 함께 낮아졌다.
성균관과 함께 한 학생운동과 대학 탄압사
성균관 유생이 공부에만 전념한 건 아니다. 오늘날 대학가에서 볼 수 있는 신입생 환영 행사가 있었고, 학생회라 할 수 있는 재회(齋會), 학생 대표인 장의(掌議)도 두었다. 정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집단 상소를 올리거나 수업 거부 같은 집단행동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행실과 평판이 나쁜 성균관 교관을, 선조 때는 문제 있는 조정 대신, 관원, 내관을 비판하는 글을 써붙이는 벽서(壁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유생이 상소를 올리는 유소(儒疏) 뿐 아니라 성균관에서 퇴거하는 공관(空館), 기숙사를 비우는 공재(空齋),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권당(捲堂)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 의사를 표출했다. 유소 하는 과정에서 유생이 줄을 지어 경복궁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우리 학생운동 역사가 '유구'했을 뿐 아니라 대자보, 수업 거부, 집단행동, 가두 행진 같은 시위 방법이 조선시대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킨 폭군 연산군은 성균관 유생의 국정 비판을 금지했을 뿐 아니라 창덕궁 가까이 있던 성균관의 철거를 명하기도 했다. 학생운동 역사뿐 아니라 대학과 학생운동 탄압 역사도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최고 교육기관답게 정도전, 권근,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조광조, 이황, 이이, 유성룡, 이항복, 최명길, 윤선도, 정약용, 김정희, 박규수, 최익현, 김창숙, 신채호처럼 조선을 이끈 인재는 모두 성균관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균관의 도서관, 존경각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1천 원권 지폐에는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성균관 명륜당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1천 원권에 퇴계와 함께 명륜당이 인쇄된 것은 퇴계가 성균관 총장 격인 대사성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강의실인데, 명륜당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 존경각(尊經閣)이다. 존경각은 성균관에서 도서관 역할을 한 곳으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대학도서관'이다.
성균관에 존경각이 설치된 것은 조선 성종 때다. 책이 부족해서 유생이 공부에 어려움을 겪자 한명회를 비롯한 대신이 임금에게 청을 올렸다. 1475년 성종은 신하의 요청을 받아들여 많은 책을 하사하고 책을 보관할 건물을 짓도록 했다. 존경각이라는 이름도 성종이 직접 지어 하사했다. '존경'은 경서(經書)를 공경히 보관하라는 뜻이다. 개교 77년 만에 성균관은 도서관을 갖게 되었다.
건립 이후 40년 이어오던 존경각은 1514년 12월 2일 밤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수만 권의 책과 건물을 모두 잃는다. 자물쇠가 채워진 상태에서 존경각 안으로부터 불이 났기 때문에 책을 훔치다가 불이 난 걸로 추정, 중종은 관원과 노비를 의금부에서 조사하도록 했다. 이듬해인 1515년 중종은 존경각을 다시 짓고 책을 새롭게 비치했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존경각은 건물과 소장했던 책을 다시 잃고 만다. 현재의 건물은 1626년 인조 때 다시 지은 건물로 1772년 영조 때 보수를 거쳤다. 건물은 다시 지었지만 전쟁이 존경각 장서에 입힌 타격은 심각해서 현종 때인 1663년 무렵 존경각 책은 200-300권에 불과했다.
* 2편 "'책 분실하면...' 정조가 성균관 도서관에 내린 명령"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