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1948년 7월 12일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 취임한 이시영은 임시정부 요인 출신으로서 새 나라 건설에 몸을 아끼지 않고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승만의 견제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거듭된 실정으로 국정은 피난지 부산에서 더욱 어지러워지기만 했다. 제헌국회의 뜻을 받아들여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된 이래 만 3년 동안이나 봉직했으나, 6ㆍ25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쟁과 이승만의 권력욕을 지켜보면서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1년 5월 1일, 이시영은 〈국민에게 고한다〉는 한 통의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전달하고 부통령직 사임서를 피난국회에 제출했다.
이시영은 〈국민에게 고한다〉는 글에서 "취임 3년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왔던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 부통령의 임무라 할진대, 내가 취임한 지 3년 동안에 얼마마한 익찬(翼贊)의 성과를 거두어왔단 말인가"라고 자탄하면서 사임이유를 밝혔다.
이 부통령의 돌연한 사임서 제출로 국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방위군사건으로 국민의 여론이 악화되고 거창민간인학살사건으로 책임문제가 논란되고 있을 때 터진 부통령의 사표제출은 국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사임서 내용 또한 노애국자의 우국충정이 담긴 명문장이었다. 국회에 보낸 공한내용을 간추려 본다.
탐관오리는 도처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망을 실추케하며 정부의 위신을 손상케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져주고 있으니, 누가 참다운 애국자인지 흑백과 옥석을 가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과거 3년 동안 아무런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布衣)로 돌아가 국민과 더불어 고락과 생사를 같이하려 한다.
나 이시영은 본시 노치(老齒)인데다가 무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선량 여러분이 돈독한 중의를 모아 부통령으로 선출해준 데 대해 과분하고 또 참괴한 일로 생각했으므로 사퇴할까 했으나 외람되게 대임을 맡았던 것이다.
취임 3년 동안에 아무런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시위(尸位)에 앉아 소찬(素餐)을 먹는 격에 지나지 못했으므로 이 자리를 물러나서 국민 앞에 무위무능함을 사과함이 도리인줄 생각되어 사표를 내는 것이다. 선량 여러분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국정감사를 더욱 철저히 하여 이도(吏道)에 어긋난 관료들을 적발ㆍ규탄하되, 모든 부정사건에 적극적 조치를 취해 국민의 의혹을 석연히 풀어주기 바란다.
이 부통령의 사임서가 전달되자 국회는 그 내용을 본회의에서 공개하고 심각하게 토의한 끝에 반려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재석 131명 중 가 115표로 반려가 의결되었다. 이에 따라 국회는 장택상ㆍ조봉암 두 부의장과 각파 대표를 부통령 숙소로 보내 사임의 뜻을 거두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국회의 각파 대표들은 이승만을 방문, 사임을 만류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이승만은 "부통령이 현정부를 만족하게 생각지 않아서 나가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리느냐"고 오히려 그의 사임을 바라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만큼 부통령의 존재를 고깝게 여겼던 것이다. 부통령 사임서는 국회에 제출된 지 3일 후에야 본회의에서 수리되었다.
이시영의 사임서가 수리된 지 3일 후인 5월 17일 국회는 부통령 보궐선거를 재석 과반수 이상의 득표자가 없어 결선투표까지 거쳐야 했다. 결선투표의 결과 김성수가 78표를 얻어 74표를 얻은 이갑성을 누르고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오죽했으면 이시영 부통령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겠느냐"며 수락을 고사하다가 결국 민국당 간부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5월 18일 국회에서 수락 연설을 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부통령 취임사를 통해 "공산주의를 격퇴하기 위해 우리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민주우방과의 친선을 더욱 돈독히 하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지키는 확고한 민주주의를 이 나라에 정착시키기 위해 행정부와 입법부가 표리일체가 되어 비상시국을 극복하자"고 역설했다.
피난국회에서 이같은 수락연설을 하고 부통령에 취임한 김성수는 국무회의에도 꼭 출석해 국정을 돌보기 위해 노력을 쏟아왔으나 잔여임기조차 채우지 못한 채, 52년 5ㆍ26정치파동이 절정에 오른 5월 29일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승만이 5ㆍ26정치파동을 일으켜 10여 명의 야당국회의원을 체포하고 국회를 탄압하면서 장기집권을 획책하자 김성수는 미련없이 사퇴를 결행하고 야당결성에 나섰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파동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6월의 피난수도 부산은 전란기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장기집권욕은 법과 질서보다 조작된 민의와 폭력에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권력을 연장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국회의원이 탄 버스가 헌병대로 끌려가는가 하면, 자신을 저격하려는 군인을 정당방위로 사살한 서민호 의원이 석방결의로 석방되었는데도 이에 항의하는 관제데모가 계속되고, 재야원로 60여 명이 호헌국국선언문을 발표하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여러 사람이 테러를 당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정정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거행된 6ㆍ25기념식전에서 이승만 저격사건이 발생하여 정계는 한층 더 심상치 않은 먹구름에 가리게 되었다.
이날 유시태(당시 62세)는 민국당 출신 김시현 의원의 양복을 빌려입고 김 의원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유유히 기념행사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하여 한참 기념사를 읽는데 2m쯤 떨어진 뒤에서 독일제 모젤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의열단 출신인 유시태는 방아쇠를 잡아당겼으나 탄환이 나가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격발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거듭 방아쇠를 잡아당겼으나 탄환은 여전히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섰던 경호헌병이 권총을 든 유시태의 팔을 탁 치고, 동시에 뒤에서는 치안국장 윤우경이 유시태를 끌어앉혔다.
대통령 암살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유시태는 헌병대로 끌려갔다가 곧 육군특무대로 이송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유시태에 이어 연루자로서 그에게 권총과 양복을 제공한 혐의로 김시현 의원이 체포되고, 뒤이어 민국당의 백남훈ㆍ서상일ㆍ정용한ㆍ노기용 의원과 인천형무소장 최양옥, 서울고법원장 김익진, 안동약국 주인 김성규 등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민국당의 고위층으로까지 수사를 확대할 기미를 보였으나 뚜렷한 혐의사실이 드러나지 않자 더 이상 확대하지는 않았다.
국가원수 살인미수혐의로 구속기소되어 선고공판에서 유시태ㆍ김시현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김성규ㆍ서상일ㆍ백남훈 의원에게는 징역7년, 6년, 3년, 최양옥ㆍ김익진ㆍ노기용에게는 무죄가 각각 선고되었다.
그후 53년 4월 6일 대구고등법원에서 열린 제2심에서 유시태ㆍ김시헌에게 사형, 서상일ㆍ백남훈에게는 징역 6개월, 1년 집행유예가 선고되고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두 사람은 대법원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복역하던 중 4ㆍ19혁명을 맞아 과도정부에서 국사범 제1호로 출감했다.
김시현은 1924년 사이토 총독과 총독부 고관들을 암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동양 최초로 제조한 시한폭탄과 권총을 반입하여 거사착수 중에 발각되어 10여 년을 복역하고 정부 수립 후에는 안동 갑구에서 민의원으로 당선된 현역의원이었다. 그는 유시태와 함께 이승만 암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지들에게 누를 끼칠까 보아 민국당을 탈당하기도 했다.
유시태는 4월혁명 후 석방되면서 "그때 내 권총알이 나가기만 하였으면 이번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한이다"라고 목메이는 출감소감을 밝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김시현은 이 사건을 이유로 치열한 독립운동가인데도 국가의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