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정에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민주당의 대선구호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구호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후계 정당에서 변주되기도 한다.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선거와 제4대 부통령선거는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 후보가 국민 직선에 의해 대결하는 '선거다운 선거'의 효시가 되었다.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이 함량이 크게 부족한 측근 이기붕을 러닝 메이트로 지목하고, 제1야당 민주당은 신익희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 혁신계의 진보당은 조봉암과 박기출을 정ㆍ부통령 후보로 각각 선출하여 대선 진용이 짜여졌다.
4사5입 개헌파동으로 이승만의 3선 출마의 길을 튼 자유당은 공공연하게 이 대통령의 후계자로 등장한 이기붕을 러닝 메이트로 묶어 당선시키기 위해 1년 반 동안에 걸쳐 정지작업을 진행해 왔다. 다수의 문인ㆍ학자ㆍ언론인들이 이기붕의 호를 딴 '만송족'이 되어 그의 부통령 만들기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노회한 이승만은 3월 5일 실시된 자유당 지명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았음에도 불출마를 선언, "제3대 대통령에는 좀 더 연부역강한 인사가 나와 국토통일을 이룩해주기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정치적인 위장술책이었다.
이렇게 되자 자유당은 각종 관제민의를 동원하여 이승만의 번의를 촉구했다. 연일 경무대(청와대) 어귀에는 관제 데모대가 집결하여 이승만의 재출마를 탄원하는가 하면, 자유당 지방당부와 지방의회로부터 재출마를 간청하는 호소문ㆍ결의문ㆍ혈서가 답지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평소에는 서울시내의 통행을 규제해오던 우차와 마차를 총동원하여 "노동자들은 이 박사의 3선을 지지한다"는 함성을 지르도록 하는 소위 '우의마의'까지 동원하여, 국제적인 조소꺼리를 만들었다.
이때 시위에 동원된 사람이 연인원 500만 명이고, 연판장에 서명한 사람은 300만 명에 이르렀다. 물론 이들 역시 동원된 서명자들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유권자 총수와 맞먹는 수치였다.
이와 같이 관제민의 소동이 절정에 이르자 마침내 이승만은 3월 23일 담화를 통해 "민의에 양보하여 종전의 결의를 번복하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하였다"고 밝히면서 선거전에 나서는 곡예를 부렸다.
민주당도 정ㆍ부통령후보 선출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과 대립이 벌어졌다. 후보선정에 있어서 신익희(민국당 계열)와 장면(원내자유당 계열)의 지지세력 사이에 심각한 대립을 나타냈으며 부통령 후보에는 조병옥과 김준연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그후 몇 차례의 타협 끝에 3월 29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후보에는 구파의 신익희, 부통령후보에는 신파의 장면을 선출하기에 이르렀다.
혁신계에서는 진보당추진위원회에서 대통령후보에 조봉암, 부통령후보에 박기출을 내세웠다. 이렇게 하여 이승만ㆍ신익희ㆍ조봉암으로 압축된 제3대 대통령 선거전은 투표일인 5월 15일을 향해 서서히 열기가 달아오른 가운데 야권후보 단일화 운동이 추진되었다.
조봉암은 ①책임정치의 수립 ② 수탈없는 경제체제의 실현 ③ 평화통일의 성취 등 3가지 정책을 신익희 후보가 수용하면 용퇴하겠다고 제의했다.
민주당에서는 야당후보 단일화를 기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조봉암의 협상제의를 수락하고 ①내각책임제와 경찰의 중립화 ②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③경제조항의 재검토 등을 협상 조건으로 내걸고 야당연합전선을 위한 담판에 나섰다. 진보당은 막바지 회담에서 "진보당에서 대통령후보를 양보할테니 민주당에서 부통령후보를 포기하라"는 협상안을 제시하였다.
20여 일을 끈 두 야당의 협상이 지지부진한 채 5ㆍ15선거전은 어느새 중반전에 접어들었다.
민주당은 선거구호를 "못살겠다 갈아보자"로 내걸고 자유당의 실정과 독재, 부정부패를 공격하고 나서고, 자유당은 노골적으로 "구관이 명관이다", "갈아봤자 별 수 없다"는 등의 구호로 맞서면서 조직확장에 총력을 경주했다.
서두에서 쓴대로 이때 민주당의 선거 구호는 역대 선거사상 가장 탁월하고 시의에 적합했던 것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던 국민들까지 투표장으로 불러오게 만들었다.
선거전은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다. 전국 각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농촌에까지 민주당은 붐을 일으켜 지지자가 늘어나고, 정부기관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이 민주당에 동조하는 논조를 보이는 등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이같은 선거분위기를 끝까지 끌고가기 위해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서울에서는 마지막 신익희 후보의 유세를 열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한강 백사장에 당시 서울 인구 70만 정도일 때, 30만 인파가 모인 이 강연회는 선거사상 처음 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구름같이 모여든 인파 속에서 신익희 후보는 "대통령은 우리 국민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심부름꾼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주인이 갈아치우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면서 정권교체를 역설하여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시민들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연발하며 박수갈채를 보내었다.
한강 백사장의 강연회가 전대미문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신 후보는 일요일인 4일 장면 후보와 함께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고 지방에 야당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전북 이리로 내려갔다.
그러나 연일 과로가 겹친 신 후보는 선거를 10일 앞둔 5일 새벽 4시쯤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운명하고 말았다.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거듭거듭 군사독재자와 사이비 민주주의자들을 만나는, 불운이 겹쳤다. 이때 신익희가 사망하지 않았으면 처음으로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제1야당의 후보를 잃은 채 실시된 선거전에서 이승만의 승리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야권 단일후보가 되었으나 장면이 속한 민주당 신파 측은 '조봉암 대통령' 보다는 '민주당부통령'을 택하여 결국 이승만의 재집권이 이루어졌다.
민주당은 공공연히 '신익희 추모표'를 찍으라고 말하고, 심지어 김준연은 이승만을 찍겠다고 공언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은 이승만의 장기독재를 허용하는, '도끼로 제발 찍는' 우를 저질렀다.
개표결과 이승만 504만 6,437표, 조봉암 216만 3,808표, 신익희 추모표 185만표로 집계되었다. 엄청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총투표수의 80% 이상을 획득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겨우 52% 득표율에 그쳤다.
부통령에는 박기출이 사퇴하면서 장면이 401만 2,654표로 380만 5,502표를 얻은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자유당은 이 선거에서 실제적으로 패배한 셈이 되었다.
서울에서 이승만은 20여 만 표 밖에 얻지 못했는데 무효표(추모표)가 28만여 표나 나왔다. 민심은 이승만과 자유당을 떠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정권교체는 다시 수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해공 신익희 장례식을 맞아 학자 이희승은 〈해공의 급서를 애통함〉이란 추모시를 지었다. 제2연을 소개한다.
해공의 급서를 애통함
하늘도 무심해라
임 가시는 이 날이여
땅을 치고 몸부림해도
천지는 아득히 말이 없네
온 겨레 환호소리
터지는 마당에
임이 가다니
이역 풍상에도
꿋꿋하던 그 모습
아! 해공 선생.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