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6일의 천안함 사건은 우리 군인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슬픈 사건일 뿐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은 물론이고 일본 점령지 오키나와의 운명에도 영향을 준 사건이다. 그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다.
사건의 실체가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은 북한의 소행에 의한 폭침 사건으로 규정했다. 그 결과, 최대 이익을 본 쪽은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버락 오바마 정권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명박 정권의 여론 선전전에 편승해 오키나와의 미군 비행장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서양인들은 1870년대부터 오키나와의 전략적 중요성에 주목했다. 중국과 동아시아를 견제하는 데 유리한 지역으로 평가했다. 러시아와 더불어 당시의 세계 최강인 영국도 그런 이유로 눈독을 들였다.
한국인 역사학자 김기혁이 198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펴낸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최종 단계(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에 따르면, 1876년 런던에서 발행된 어느 잡지에 '오키나와는 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이므로, 영국이 동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를 남보다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린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오키나와는 한자 유구(琉球)로 표기되는 독립 왕국이었다. 영국이 탐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인 쪽은 일본 정부였다. 위 잡지는 이듬해인 1877년 이와구라 도모미 법무대신을 통해 일본 정부에 소개됐고, 1879년에 일본이 오키나와 강점을 서둘러 단행하도록 만드는 촉매제가 됐다.
미국이 부담스러워 한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미국이 1945년에 오키나와를 점령한 것도 그런 전략적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넘겨준 뒤로도 계속해서 미군기지를 이곳에 두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곳이 동아시아 견제에 유리하다는 점은 김하영의 논문 '천안함 사건을 통해 본 동아시아 질서 변동과 한반도'의 다음과 같은 한 문장에서도 드러난다.
"동북아 지역의 주요 도시들은 대부분 오키나와에서 2천 킬로미터 안에 있고, 특히 중국의 동단 중부 지역은 8백 킬로미터 정도 밖에 안 된다."
- 책갈피가 2010년 6월 발행한 <마르크스 21> 제6호.
그런 오키나와 군사기지 중 하나인 후텐마 비행장을 철거하라는 압력이 지난 20세기부터 있었다. 1879년부터 누적돼온 오키나와인의 반외세 감정과 더불어, 현실적인 제반 요인이 결합되면서 이런 요구가 강해졌다. 윤종구 <동아일보> 특파원의 '일본 현지 보고: 후텐마 미군비행장 이전을 중심으로 한 미일관계 갈등'은 이렇게 설명한다.
"후텐마 비행장은 민간 지역에 둘러싸여 있다는 입지 조건 때문에, 소음과 환경오염은 물론 이착륙 시의 안전 문제를 이유로 꾸준히 이전 요구가 제기돼 왔다. 1995년 미군 3명에 의한 소녀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주민의 이전 요구가 절정에 달했다. 이듬해 미·일 정부는 '충분한 대체 시설이 완성돼 운용 가능하게 되는 것'을 전제로 후텐마 비행장 이전에 합의했고, 2006년 5월에는 나고시 캠프 슈와브 연안부로 2014년까지 이전하기로 했다."
- 국민대 일본학연구소가 2009년 발행한 <일본 공간> 제6권.
1995년 합의와 2006년 합의는 후텐마 비행장을 오키나와 내의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009년 8월 일본 중의원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308석을 확보한 민주당이 자민당(자유민주당, 119석)을 제2당으로 밀어내면서 후텐마 비행장 문제에 변화가 생겨났다.
민주당의 승리를 이끈 뒤 총리에 취임한 하토야마 유키오(1947년 생)는 미국이 볼 때 꽤 부담스런 인물이다. 대미 종속적인 일본 외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퇴임 후인 2015년 8월 12일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무릎 꿇고 절하면서 "진심으로 죄송하고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참회한 적도 있다. 유관순 열사가 수감됐던 감방에도 꽃을 바쳤다. 일본 우익과 미국이 볼 때 '좀 위험한 정치인'이다.
소에야 요시히데 게이오대학 교수는 한국 학술지에 기고한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안보 정책: 하토야마 유키오와 간 나오토 정부를 중심으로'에서 하토야마의 외교적 주장을 이렇게 소개한다.
"미군 기지가 오키나와에 집중 배치되어 있는 현실을 당연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
"일본의 평화는 일본인들에 의해 건설되어야 한다. 대미 안보 의존은 향후 반세기 혹은 1세기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된다. 후텐마 문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의 시대가 금방 도래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언젠가 다가올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라는 슬로건 구현을 위해 한국 및 중국과 더불어 동아시아를 창조해야 한다."
- 한국전략문제연구소가 2010년 7월 발행한 <전략연구> 제17권 제2호.
후텐마 기지는 대미 의존을 상징하므로 재고해야 한다, 미국이 아닌 한국·중국과 함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야 한다 등등이 하토야마의 신념이다. 안 그래도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약화를 고민하던 미국을 바짝 긴장케 할 만한 신념이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바뀐 오키나와의 운명
그런 하토야마가 정권을 잡으면서 후텐마 문제에도 변수가 생겼다. 민주당의 총선 공약 중 하나가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외부 또는 일본 밖으로 이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공약을 실천에 옮겼다. 위의 1995년 및 2006년 합의를 뒤집고, 사정변경을 이유로 미국의 양해를 촉구했다.
물론 오키나와 미군기지 전체를 옮기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45년 이래 64년간(2009년 기준) 오키나와를 근거로 중국과 동아시아를 견제해온 미국으로서는 '후텐마 비행장을 오키나와 밖으로 빼라'는 요구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터진 게 바로 천안함 사건이다.
미국은 이 사건을 하토야마의 요구를 물리치는 명분으로 활용했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북한 폭침설을 명분으로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 위의 김하영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천안함 사건이 터진 뒤 미국은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줄곧 일본을 압박했다.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한국이 맞닥트린 위험은 일본에도 위협'이고 '일본 국민도 북한 공격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고 했다."
친미파가 일본 정계를 점유하고 미군이 일본에 주둔한 상황에서 하토야마의 신념이 국정에 반영되는 데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타협했다. 오키나와 밖으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취소하고, 오키나와 내의 헤노코로 이전한다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후텐마 기지는 2019년 현재까지도 그대로 존치돼 있다. 헤노코 주민들의 저항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미국과 알력을 빚는 과정에서 하토야마는 지도력 부재와 정책 혼선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거기다가 정치자금 문제까지 터졌다. 그래서 위상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2010년 6월 2일 사퇴하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가 제기한 천안함 북한 폭침설이 오키나와를 둘러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한편, 미국 패권에 '살짝' 저항한 하토야마의 뜻을 꺾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