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은퇴한 나이를 이미 지난 나는 한국 나이로 50세를 분수령으로 두 번째 유형의 인생을 살고 있다. 두 번째 유형의 삶은, 첫 번째 유형의 삶과 달리 하나의 직업으로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다. 대략 두 개의 주제 아래 다양한 활동이 연결되어 수행된다. 그중에는 직무의 성격상 '멘토'로 불리는 활동들이 있다.
내가 그들에게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이라고 '오해'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조직의 형태상 불가피하게 내가 멘토를 맡아야 하는 상황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멘토' 역할과 관련하여 나는, "기능과 지식 면에서 여러분에게 멘토링하는 것이지 인격이 뛰어나거나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서는 아니다"라고 대학생들에게 말한다.
이때 인격과 인생을 거론하며 가장 무겁게 검열하는 것은 페미니즘이다. 50대 남성 지식인이 대학생을 멘토링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것이 페미니즘이란 고백을 기성세대는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모임에는 여성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여대·남녀공학을 막론하고 이들의 인식에서 페미니즘은 기본값으로 주어져 있다. 남학생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은 게, 페미니즘의 각성을 거치지 못한 사람은 선발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함께 생활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배척하거나 왕따를 시키는 게 아니지만, 구성원 거의 대부분이 페미니즘을 공유하고 있어서 페미니즘의 이해 없이는 대화불능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때로 함께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조직 내 사실상 유일한 기성세대인 나에게도 상황은 동일하다. 나 또한 페미니즘으로 각성된 사람이어야 하고, 나아가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조심스럽지만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다면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또한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는 질문에 '조심스럽게' 긍정의 답변을 내어놓는 정도의 위축된 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을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나의 조심스러움을 쉬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나는 소위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스스로 페미니즘의 각성을 거쳤다고 믿지만 동시에 페미니즘의 적인 '아저씨'의 한 사람이다(페미니즘의 적이라는 말에 섭섭해 하지 말기를 바란다. 실제로 적이니까.). 내 주변의 많은 아저씨들 중에 페미니즘에 관하여 나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예컨대 내 세대에서 어떤 아저씨들은 자신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데, 물론 농담이겠지만, 그 이유는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과 교류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계급성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사람의 계급성을 판단하는 여러 가지 잣대가 있지만, 주변 사람들 또한 그 잣대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을 페미니즘에 원용하면 나는 페미니스트일 수가 없다.
더 본질적으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나의 삶이, 내가 구분하듯 말한 주변의 아저씨들과 실제로 달랐냐 하면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다는 사실이 지적될 것이다. '각성' 이후의 나의 삶 또한 결코 완전한 '결백'을 주장하기 힘들 법하다. 아마도 가부장제 사회에서 태어나서 남자로 길러지고 남성의 정체성을 갖게 됐다는 본원적 변명이 가능하리라.
그 성(性)정체성은 일상의 삶 속에서 불편과 차별에 직면하지 않기에 당사자로서 체험하는 절실한 '계급적 각성'을 자연스럽게 소환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유를 통한 각성이 생각을 바꿔놓을 수는 있지만, 50년 가까이 축적되어 무심결에 분출되는 남성적인 (페미니즘 입장에선 '가해자' 진영의) 행태를 하루아침에 근절시키기는 어렵다. 상투적인 변명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설명이다.
현실적인 한계를 설명하고 상투적인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적당히 '페미니스트' 장식을 다는 것으로 시대를 모면할 생각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확고한 시대적 요청이고,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었든 늙었든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그것도 올바르게.
'정말 조심한다고?' 호언장담할 수 없는 이유
중년 한남(한남인지, 한국남자인지, 한남충인지 그런 얘기는 다음에 하자)치고는 그럭저럭 큰 문제 없이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판단은 주변의 젊은 대학생들의 일부 의견을 참조하여 스스로 내린 것이기에 '참조'에도 불구하고 '참조'의 범위와 진정성의 문제로 오판일 가능성은 상존한다. 참조와 별개로 결정적으로 내 판단 자체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
요즘 50대 이상 관리자급 이상의 남성 대부분은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자신이 정말 '조심'하기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직접 목격하기도 하지만, 그 호언을 비웃는 여성 지인들의 전언으로 듣기도 한다. 실상은 그들의 호언과는 반대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나를 돌아본다.
결론적으로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중년 한남이지만, 동시에 중년 한남의 행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히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충실한 페미니즘 지지자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중년 한남 따위의 지지는 필요 없다"고 말할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단호한 입장의 맥락을 이해하기에 내가 그들의 의견을 반박할 이유가 없다. 다만 당사자로서 페미니스트이든, 비(非)당사자로서 페미니즘 지지자이든, 페미니즘이란 시대정신을 수용하고 표명하며 반(反)페미니즘의 강력한 저항에 맞서는 데 어떤 식으로든 힘을 보태는 것은 양심의 문제이자 진보의 문제이다.
만일 누군가 진보하는 세상을 꿈꾼다는 그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내가 중년 한남이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관해 발언하려는 이유 역시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점점 더 많은 이의 이익과 자유가 신장되는 것이 진보라고 한다면, 진보하는 세상이라면 당연히 차별과 혐오가 점점 사라져야 하는데, 지금 우리 눈앞에는 혐오와 차별이 만연해 있다. 우리 사회의 이른바 적폐 중 여성차별과 여성혐오의 비중이 너무 크기에 이 문제의 해결 없이 더 나은 세상을 운위한다면 그것은 기만이 되지 싶다. 따라서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었든 늙었든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논하고 실천하며 반(反)페미니즘에 맞서는 것은 바람직한 시민행동의 기본 중 기본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