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을 맞은 2019년 3월,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반민특위' 망언으로 반민족 친일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키웠습니다. 그러자 지난 15일 자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곽상도 의원은 '고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도 친일파 아니냐'는 식의 문제 제기를 제기했습니다. 곽 의원의 정확한 발언은 이렇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으로 입사해서 부를 축적한 김지태의 유족들이 1987년 국가상대로 제기한 법인세(※상속세를 잘못 말한 것) 취소소송에 문재인과 노무현 대통령이 나서 전부 승소하여 국가로부터 117억 원을 돌려받았다. 친일파 재산은 국고로 환수해야 하는데 국가가 졌다. 유족들이 상당한 도움을 받지 않았겠나. ...(중략)...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비서실장 재직 시절 김지태를 친일·반민족 행위자 명단에서 빼줬다. 누가 친일파인지 모르겠다. ...(중략)... 나중에 2002~2003년 사이 유족들 사이 재산분쟁이 생겼을 때 소송 당시 제출한 서류들이 허위서류고 일부 유족들이 위증을 했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는데, 공소시효가 남아있다면 소송사기로 수사해야 될 사항이다."
이 같은 주장은 언론의 '받아쓰기 기사'를 통해 각종 매체에 보도됐습니다.
YTN <"친일 인증" vs "좌파 면죄부"…막말 장외 난타전>(3/15, 조은지 기자)은 나경원 원내대표의 '반민특위' 망언과 이를 둘러싼 여야의 주장들을 보여줬고, 마지막에 "곽상도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변호사 시절 친일파 유족의 재산 환수 소송을 변호한 일이 있다며, 누가 친일파냐고 역공을 펴기도 했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YTN은 "117억인가 하는 돈을 유족들에게 환수받아갈 수 있게 했습니다, 친일파 재산은 국고로 귀속시키는 게 정상이지 않습니까, 친일 문제도 대답은 없고 청산하자고 합니다, 본인들을 어떻게 청산하죠?"라는 곽상도 의원의 주장을 그대로 실어주었을 뿐, 이 사안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었습니다.
<중앙일보>는 한술 더 뜹니다. <중앙일보>는 '곽상도 "문, 과거 친일파 유족 소송 맡아 승소…누가 친일파인가"'(3/15, 임성빈 기자)에서 기사 전체를 곽상도 의원의 주장으로 채웠습니다.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봐도 나오는 반론을 <중앙일보>는 단 한 줄도 싣지 않았고, 이에 대한 반론도 없었습니다.
<조선일보>도 토요판 지면에 '정치권 때아닌 친일 공방…"한국당은 토착 왜구" "문재인·노무현, 친일파 유족 소송 맡아"'(3/16, 원선우 기자)라는 기사를 내고 기사의 절반을 할애하여 곽 의원의 주장을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조선일보>는 곽상도 의원의 주장에 "노 전 대통령은 김씨의 부산상고 후배로, 김씨의 '부일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저서 <운명이다>에서 김씨에 대해 "평생 존경했다" "내 인생의 은인"이라고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반론성 추가 취재는 단 한 줄도 없었지만, 곽 의원의 주장을 부연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나선 셈이죠. 이밖에 각종 극우 인터넷 언론과 유튜브에서도 곽 의원의 주장을 다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곽상도 의원의 주장은 사실일까요?
김지태는 누구인가
곽상도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친일파를 변호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김지태씨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김지태씨가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표적 치부인 정수장학회 강탈 논란의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김지태씨는 1908년생으로, 부산공립상업학교를 다니다 일본인 교사의 소개로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 기업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직원으로 입사했습니다. 이 같은 경력이 있음에도 김지태씨가 적극적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은 것에는 그가 같은 기간에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에서 간부로 활동한 경력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김지태씨는 입사한 지 5년 만에 폐결핵으로 사표를 냈습니다. 김지태 회고록의 본인 주장에 따르면 이때 그를 안타깝게 여긴 일본인 지점장이 호의를 베풀어 울산에 있는 토지 2만 평을 불하받았습니다. 김지태씨는 이를 바탕으로 사업가가 되었고, 크게 성공하여 해방 후 자유당 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삼화그룹, 부산일보를 거느리고 MBC를 설립한 미디어재벌‧정치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정수장학회 강탈 논란은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2년 김지태씨를 체포했고, 그가 운영하던 언론사 3사와 부일장학회를 5‧16 장학회(정수장학회 전신)로 넘기는 대가로 석방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설치된 국가정보원 산하 과거사위에서 이 주장은 사실인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소송에 들어간 김지태씨의 유족은 2014년 대법원에서 '강압에 의한 주식 증여'가 있었음은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취소권 행사의 법적 기간이 지났음'을 이유로 그의 재산을 돌려받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살펴보면, 박정희 및 보수 세력이 동양척식회사 근무 경력만을 가지고 김지태씨가 '친일파'라는 주장을 꾸준하게 제기하는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친일행위에 대한 절실하고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친일 잔당들을 골라내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김지태씨가 친일파가 되면, 자신들이 언론 장악과 개인재산 형성을 목적으로 김지태씨의 재산을 빼앗은 것을 '친일파의 재산을 환수'한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김지태씨가 '친일파'가 되면 고 노무현 대통령을 타격할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부일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은 경력이 있으며, 부일장학회 관련 재판을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보수세력은 수시로 '김지태 친일론'을 들고 나옵니다.
실제 18대 대선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예비후보의 공보단장이었던 이정현씨는 정수장학회 강탈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김지태씨의 친일을 문제 삼았습니다. 더불어 "노 전 대통령은 중학교 시절 부일장학금 혜택을 받았고, 변호사 시절에 김지태씨와 관련된 100억 원대가 넘는 소송을 참여했다는 인연이 있다, 문재인 후보는 무슨 인연으로 이분을 감싸는가"라며 공격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곽상도 의원의 지적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노무현이 김지태를 친일파 명단에서 뺐다?
곽상도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김지태씨를 친일파 명단에서 '뺐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명단'에서 '빼'려면 애초에 그 사람이 명단에 들어가 있거나 최소한 유력하게 고려가 되어야 하는데, 김지태씨는 해방 직후 설립된 반민특위를 비롯한 여타 친일파 목록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곽 의원이 어떤 명단을 말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노무현 대통령 당시 정부 차원에서 제작한 친일파 명단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06인 명단입니다. 이 명단은 2006년 106명, 2007년 195명을 각각 발표하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9년에 705명을 추가로 확대하여 발표하였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김지태씨가 부당하게 제외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9년에 거의 2배 이상 규모의 명단을 발표했는데도 왜 여기에는 들어가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한편, 민간에서 만든 명단까지 확대하면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친일명단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4389명 명단에도 김지태씨는 없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명단 등록 기준으로 '일제의 경제침탈정책을 입안 또는 의사결정을 주도한 자'와 '이의 수행에 적극 협력한 자', '국책경제기관과 경제단체의 간부'로 규정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지태씨가 동양척식회사 하급직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선정 기준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과거 김지태씨를 친일파로 몰아간 사람들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사원으로 5년 근무한 경력 이외에는 어떤 근거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지태씨가 친일파였다는 이야기는 정수장학회와 새누리당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또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근무한 것은 맞고 떳떳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해방 이후 친일파 규정 기준에 비춰보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간부가 아닌 말단 직원을 친일파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김지태가 박정희에게 재산을 뺏길 때는 '친일파'라는 죄목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김지태가 친일파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몇 배 더한 친일파 박정희가 친일파 재산을 환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노무현·문재인이 친일파 재산 국고환수 막았다?
곽상도 의원은 '친일파 재산은 국고로 환수하는 것이 당연한데,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국가상대 소송에서 이겨 유족이 도움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곽 의원이 연도는 틀렸지만, 김지태씨의 유족들이 1984년 상속세 부과 취소소송을 내고 1986년 대법원에서 승소하여 상속세 117억 원가량을 내지 않은 것, 이 소송을 당시 세법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맡아 승소했지만 2003년께 유족들의 유서 조작이 드러난 것은 사실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소송에 관여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친일파 재산 환수를 노무현‧문재인이 막았다'는 프레임으로 끌고 간다면 이는 완벽한 거짓말이 됩니다. 우선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김지태씨는 친일파로 보기 어려운 인물이며, 유족들이 1984년 상속세 부과 취소소송을 낸 경위도 친일파 재산 환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2013년 김지태씨의 유족들이 정수장학회 강탈에 대해 증언하자 유족들의 유서 조작 전력으로 정수장학회 강탈 논란을 방어하기 위해 나온 신동아 기사 <김지태씨 유서는 유족이 조작했다>(2013/2/18)에는 1984년 벌어진 상속세 취소소송에 대한 자세한 전후 사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김지태씨는 1972년부터 아들들에게 기업 경영권을 상속했으나 그들의 경영 실패로 회사가 위기에 빠지자,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은행에 담보 설정하여 대출을 받았습니다.
1982년 김지태씨가 사망하자 유족들은 담보 설정된 부동산을 부채와 함께 상속받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면 회사가 부채를 갚지 못할 경우 상속세만 내고 부동산은 그대로 은행에 넘어갈 우려가 있었습니다. 유족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김지태씨가 생전에 해당 토지를 회사에 증여했다고 유서를 날조하여 상속세를 내지 않은 것입니다. 즉, 유족들이 유서를 조작했든 하지 않았든 친일파 재산 환수와는 거리가 먼 사건인 것이죠.
앞서 본 바와 같이 김지태씨가 친일파라는 주장은 특정인에 대한 단순 친일 논란이 아니라 박정희 군사정권의 언론 장악을 목적으로 한 민간 자본의 약탈과 이를 정당화하려던 박근혜 전 대통령, 그리고 부일장학금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인연으로 김지태씨 유족에 대한 소송 대리를 맡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 등 매우 복잡한 맥락이 얽혀있는 주장입니다.
언론이라면 최소한 이전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었고, 경과는 어떠했다는 정도의 맥락은 제시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언론은 여야 대결 구도에만 빠져 단순 받아쓰기로 일관했습니다. 그 결과, 곽상도 의원의 주장은 정치권 공방으로 소비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더욱 부풀려지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