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일 개봉된 영화 <사바하>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창시자인 홍암 나철(1863~1916)의 사진이 잘못 사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철은 오기호와 함께 을사오적 암살 활동을 벌이고, 민족종교 대종교를 창시하는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비중 있게 거론되는 인물이다.
영화 <사바하>는 종교문제연구소를 운영하는 목사가 신흥종교의 비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사연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는 사이비 교주의 사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철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내보내 물의를 일으켰다. 29일 <사바하> 제작사는 "명백한 실수였다"라면서 "인지하지 못했다, 죄송하다"라는 입장을 내놨다.
나철은 누구?
1863년 전라도 보성에서 출생한 나철은 일반적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바로 '과거시험 급제자'라는 사실이다.
1894년에 과거시험이 공식 폐지됐기 때문에, 훗날의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은 과거시험과 인연이 멀었다. 500년간의 과거급제자 평균 연령이 36.7세였기 때문에, 1894년 이전의 과거 급제자가 1905년 이후 본격화되는 항일투쟁에 청춘을 바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나철은 29세 때 장원 급제하고 승정원(주상 비서실) 등에서 근무했다. 한양·경기·충청·경상도 출신에 비해 관직 진출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호남 출신임을 감안하면, 비교적 안정적인 인생 행로를 걸은 셈이다.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경력이 특별한 편이다.
그러나 나철은 편안한 생활을 오래 버티지 못했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지자, 1905년 징세서장을 사임하고 본격적 구국운동의 길에 뛰어들었다. 세금 거두는 것보다 나라 구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던 것.
'을사오적을 처단하자'... 전직 관료의 놀라운 행보
그전까지 안정적인 엘리트의 길을 걸었던 것과 비교할 때, 항일투쟁은 상당히 거칠었다. 임금을 모셨던 승정원 관료가 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일들을 그는 전개해 나갔다.
처음에는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해 두 민족이 서로 공존하면서 각기 주권을 존중하자"라며 독립을 호소했다. 이토 히로부미도 면담하려 했다. 하지만, 이토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말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판단하게 된 나철은 귀국 뒤 무기를 들었다.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다섯 대신들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의 목숨을 거두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이를 위해 오혁이라고도 불리는 오기호 등을 모아 20여 명의 인원으로 조직을 꾸렸다. '감사(敢死)의용단'이 바로 이 조직이다. 사(死)를 각오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담은 조직이었다. 그는 활동자금을 마련하고자 위조 지폐까지 찍어냈다. 그가 추진한 오적 암살 활동이 역사학자 이이화의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 3권에 이렇게 묘사돼 있다.
"오적이 대궐로 들어갈 적에 행동대원이 한꺼번에 총을 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5적의 입궐 시각이 달라 실행되지 못했다. 나철 일행은 폭탄을 넣은 상자를 선물로 위장, 박제순·이완용에게 보냈다. 뱀 같이 약은 박제순이 폭탄임을 알아차리고 이완용 등에게 연락, 선물상자를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완용 등이 폭사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자 나철은 새로운 작전에 착수했다. 오적을 개별적으로 찾아가 죽이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각자 5적을 분담하여 권총 저격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이홍래라는 청년이 길가에 숨어 있다가 권중현에게 총을 쏘았는데 빗나가 부상만을 입히고 말았다. 이홍래는 곧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배후세력을 실토했다."
권중현에게 부상을 입히고 붙들린 이홍래의 실토로 조직원 18명이 체포되자, 나철은 자신이 주동자임을 밝히고 형사 처벌을 자청했다. 이로 인해 10년형을 받고 귀양을 가게 됐지만, 5개월 뒤 특사로 풀려났다. 그 뒤 재산을 다 털어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 호소 활동을 한 번 더 전개했다. 과거에 일본에서 못다 했던 일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역시 효과가 없었다.
종교로 눈을 돌리다
그가 새롭게 결심한 것은, 민중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강한 종교를 활용해 항일운동의 신국면을 여는 일이었다. 이런 결심이 한국 종교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종교로 이어지는 단군교를 창시하는 역사적 국면을 열게 된 것. 고조선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인정하고 그 뜻을 계승해 독립운동을 펼치고자, 고조선 군주인 단군을 숭배하는 조직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천도교·불교·기독교 지도자들로 구성된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종교를 통한 항일운동을 구상한 나철의 판단은 시대 흐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대종교를 통한 그의 민족주의에 관해 정영훈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홍암 나철의 종교민족주의'라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홍암의 대종교는 비록 인류의 구원을 추구하는 보편 종교의 성격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민족의 고유 종교로 자처하면서 이 고유 종교의 부활을 통한 민족 부활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말·일제 하의 종교민족주의 중에서도 전형적이며 독특한 지위를 가진다.
대종교는 한민족이 공동 조상으로 상징하는 단군을 교조이자 신앙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국조 숭봉과 고유 종교의 추이가 역대 국가의 성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관점 하에 고유 종교가 존립·발전해야만 민족의 부활이 도모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002년 발행한 <정신문화연구> 제25권 제3호.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깔린 단군 신앙을 기초로 독립운동을 개시한 나철을 일본제국주의는 특별히 경계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매우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철과 대종교를 집중 탄압했다. 집회도 금지하고, 자금 활동도 간섭했다. 숨을 쉴 수 없도록 훼방한 것.
활동이 벽에 부딪히자 나철은 마지막 수단을 강구한다. 민족종교 교주로서 순국·순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립투쟁의 의욕을 자극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단군 유적이 있는 황해도 구월산으로 올라가 단식과 성찰의 시간을 보내다가 호흡을 조절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언은 '독립투쟁에 헌신하라'였다.
만주로 향한 대종교... 무장투쟁의 계기를 마련하다
나철이 죽은 뒤 대종교는 새로운 전기를 열고자 본부를 만주로 옮겼다. 이로써 만주에서 무장투쟁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다. 대신, 대종교의 국내 활동을 위축시켰다. 민족대표 33인 중에, 이 강력한 민족종교의 지도자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일제의 탄압과 나철의 죽음으로 대종교가 만주로 기반을 옮겼기 때문이다.
홍암 나철은 안정적인 세무서장직을 과감히 버리고 을사오적 처단운동과 독립 호소 운동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민족의 정신적 원천을 독립운동에 활용하고자 대종교를 창시하고 이 종교의 기반을 다졌다.
그런 독립운동가의 얼굴이 영화에서 사이비 종교 교주의 사진으로 활용된 것은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다. 제작진이 단순히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차원이 아니라, 보다 철저한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