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관장 백지숙)은 런던 테이트미술관과 공동주최로 올 여든 둘인 '데이비드 호크니(D. Hockney)전'을 본관 2·3층에서 8월 4일까지 연다.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호크니의 대규모 개인전이다. 테이트미술관 등에서 대여한 회화, 사진, 판화 등 133점을 선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이 오래 공석이었는데 백지숙 관장이 새로 부임해 활기를 되찾았다.
호크니가 팔순이 된 지난 2017년, 런던 테이트, 파리 퐁피두,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그의 전시가 있었다. '21세기 피카소'라 불리는 그는 우리 시대 최고의 화가로 주목 받는다.
이번 서울전은 2017년 구미 순회전과는 별개로 독일과 베이징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한국의 이승아 큐레이터와 영국의 헬렌 리틀 큐레이터가 전시 준비를 맡았다.
영국에서 호크니의 위상이 실제 어떠냐고 헬렌 리틀 큐레이터에게 묻자, 영국에서 국보급 화가일 뿐만 아니라 미술이론가로도 명성이 높단다. 2012년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영국의 '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제 그는 영국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아이콘 작가가 되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는 수영장 그림, 초상화 그림, 사진 콜라주, 요크셔 풍경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해온 노 작가의 모습을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다. 며칠 전 지인의 전시장에 갔다가 우연히 '아트놈' 작가를 만났다. 그가 2017년 런던에서 호크니 전(2월 9일-5월 29일)를 봤는데 아침에 표를 사면 저녁에야 겨우 전시를 볼 정도로 관객이 많았단다.
2018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위 작품 <예술가의 초상(수영장 시리즈)>은 1019억 원에 낙찰, 생존 작가 중 최고가격을 경신했다. 수수께끼가 많은 작품으로 그의 동성애 이야기가 살짝 담겨있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서울에 오지 않았다. 런던 테이트 전시, 파리 퐁피두센터 전시, 뉴욕 메트로폴리탄 전시에서 모두 표지화로 쓰일 정도로 호크니의 대표작이다.
[60년대] 그의 눈으로 보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1976년까지 영국에선 동성애가 불법이었다. 때문에 동성애자였던 호크니는 그로 인한 괴로움을 이 작품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호크니는 프래드포드 예술고 다닌 10대 시절, 하루에 12시간 작업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1959년 왕립미술학교 입학했고 1961년에는 뉴욕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 미국은 추상표현주의가 주류였지만 이런 흐름을 거부했다. 위 <도착(난봉꾼의 행각)>은 그때 작품으로 18세기 영국 사회를 풍자한 호가스의 원작을 재해석해 현대문명을 살짝 비꼰 에칭화이다.
[70년대] 수영장 그림, 난이도 높은 물 효과로 명성
호크니는 1961년 처음 뉴욕에 도착했고, 1964년부터는 LA 산타모니카 인근에 거주하며 10년간 지냈다. 그는 영국 날씨와 다르게 유리처럼 투명하고 눈부신 햇살을 발산하는 강력한 물빛에 완전히 매료됐다. 인상파 화가들이 빛의 효과를 시각화했다면, 호크니는 물의 효과를 가시화했다. 누구도 하기 힘든 그 순간의 극적 느낌을 잘 포착했다.
그는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수석 졸업자로 서양미술사에 정통했다. 고전을 모르면 현대를 창조할 수 없다. 그가 유럽회화 대가들을 자주 언급하는 이유다. 그는 항상 서양화 족보를 들춰냈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위대한 화가가 된 것은 누구보다 서양미술사의 에센스를 깊이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호크니는 그림을 통해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가 보여준 그림만큼 세상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선견지명을 얻기 위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호크니의 회화를 통해 세상을 보면 잘 안 보이는 것도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작품에는 첨단기술이 불가피하다. 유럽의 17세기 대가들이 '옵스큐라 카메라'를 사용해듯, 호크니는 디지털 등 첨단 카메라를 애용했다. 일찍부터 그는 '얼리 어답터'였다. 백남준이 그런 것처럼 '아트와 테크놀로지'는 같이 가게 되어 있다. 그가 작업할 때 장르와 매체의 구분은 사라진다.
[70년대] 새로운 인물화 '2인초상화'
호크니는 오랫동안 주변 인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여러 장 드로잉한 후 '두 사람 초상화(double portraits)' 시리즈로 많이 그렸다. 그의 인물화는 한 사람 인물화가 아니고 두 사람 인물화가 많다. 때로 세 사람도 나온다. 위 작품의 주인공은 호크니의 절친한 친구로, 당대 런던 패션산업을 선도한 디자이너 부부였다.
이들의 이름은 '클라크와 버트웰'이다. 당시 신혼이었는데 뭔가 어색하고 갈등의 소지도 보이고 긴장감이 돈다. 이 작품은 현대인에게 소통이 어렵다는 걸 암시한다. 이 작품이 '평범하지 않은(unusual)' 이유다. 이게 호크니 인물화의 독창성이다. 이 부부는 1974년에 실제로 이혼했다. 호크니는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그 복잡한 속내까지 다 그리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사람들이 호크니를 좋아하는 이유이리라. 호크니는 관객에게 호기심을 유발하며 스토리텔링을 촉발하는 면에서 귀재다. 관객의 입장에선 그림 속에 뭔가 숨겨진 사연이 많아 보여 궁금해진다. 그런 숨겨진 이야기를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실제 사람 크기와 똑같이 그려 마치 대면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80년대] '사진콜라주', [90년대] '추상' 경향
1920년대 피카소가 입체파를 발명하면서 '종이붙이기(파피에 콜레·papier collé)'를 시도했다면, 1980년대 호크니는 카메라로 그리는 회화에 도전하면서 '사진붙이기(photographic collage)'를 실험했다. 그는 여러 각도에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결합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회화에 사진을 다각적으로 실험했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10대 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높았다. 그런 면에서 '픽처를 좋아하는 인간(Homo Pictor)'의 전형이다. 자신의 유화작품과 그 작품을 찍은 사진도 같이 전시할 정도였다. 백남준이 '전자붓'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호크니는 '카메라붓'으로 그림을 그린 셈이다. 그래서 관객이 때로 이게 비실제의 '회화'인지 실제의 '사진'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나 호크니는 화가로서 회화가 영화나 사진보다 훨씬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자부심이 컸다. 그는 말했다. "그림은 움직이지 않고 말도 하지 않지만, 더 긴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림은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사진을 찍었을 때 우리가 그 순간에 본 아름다움을 다 담지 못하는 일이 허다한데 회화는 그런 것까지 다 담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피카소가 70년대 사망하자, 호크니는 그를 누구보다 깊이 추모했다. 그래서 80년대 그의 화풍에는 피카소에 대한 존경과 경외감이 담겨있다. 피카소의 입체화 풍과 유사한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두 거장은 시도하지 않은 영역이 없다는 면에서 닮았다. 피카소가 연극무대 미술을 했듯, 호크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디자인을 담당하기도 했다.
피카소가 압도하는 미술의 힘과 에너지를 보여줬다면, 호크니는 '움직이는 다시점(多視點)'이 작동되는 '움직이는 회화'를 강조했다. 화폭에 더 많은 기운생동을 심기 위한 실험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호크니는 디지털 카메라, 팩스기, 컴퓨터, 프린터, 사진콜라주, 판화, 석판화, 아이폰, 아이패드까지 닥치는 대로 다 사용했다.
위 작품도 바로 그런 시도의 한 연장 선상에 놓여있다. 한국의 병풍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앞뒤 면이 다 그림이 그려져 있다. 중국 '회권(두루마리 형식) 회화'에 대한 나름의 도전을 한 셈이다. 이런 동양적 매체에 대한 실험은 서구에서는 아주 낯선 일이다.
90년대에 와서 호크니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이전과 달라졌다. 카메라가 세상을 동질화할 수 있고 사물을 능동적으로 보게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다시 추상적 경향을 띠게 된다. 이때 다채로운 원색과 함께 관객의 시선을 끌 만한 '형광 페인팅'도 쓰게 된다. 작은 박스 캔버스를 파노라마 형식으로 수십 개를 엮는 대형화 작업을 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2천년대] 고향 '요크셔'에 돌아온 호크니
호크니는 2천년대에 들어와 '자연풍경화'로 돌아간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야외풍경화(en plein air)' 방식을 취한다. 그는 "나무는 사람 얼굴 같다. 그런데 모두가 다른 얼굴이다"라고 말했다. 자연은 비슷해 보이나 사실은 조금씩 다르다는 뜻이리라. 그는 이런 자연의 주는 놀라운 경이로움을 재발견한다. 자연에서 진정한 회화의 힘을 건져낸 것이다.
젊었을 때 그는 자유분방한 동성애자로 미국 LA시절의 눈부신 햇살을 사랑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귀향 본능이 발동한 것일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다시 자연의 품으로 회귀했다. 그의 풍경화를 보면 왠지 마음이 편해진다. 그는 자크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작품 크기에 압도되어 이즈음부터 대형화를 본격 시도했다. 그림이 "클수록 좋다"고 생각한 것 같다.
호크니의 대표작 <물가의 더 큰 나무들>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크다.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포스트-포토그래픽 시대의 신기원을 이루기 위해서(Peinture sur le le motif pour le Nouvel Âge Post-Photographique 2007)'라고 프랑스어로 적어 놓았다
팔순 넘긴 호크니, 여유롭게 웃다
교보문고에 호크니 화집 코너가 생겼다. 이번 한국 전시를 계기로 그의 인기가 매우 높아졌다는 반증이다. 팔순을 넘긴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 그의 여유로운 미소가 참으로 스마트하다.
그는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빼어난 미술이론가의 면모도 보였다. 미술사와 이론에 관한 <호크니가 말하는 호크니>, <내가 보는 법>, <명화의 비밀>, <그림의 역사> 등 다수를 출간했다. 1993년에 낸 <내가 보는 법(That's the Way I See It)>에서는 화가로서 자신이 본 대로 느낀 대로 감지한 대로의 느낌을 고스란히 화폭에 옮기고 싶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2001년에 낸 저서 <명화의 비밀(Secret Knowledge: Recovering the lost techniques of the Old Master)>이 가장 유명하다. 과거 미술의 거장들이 어떻게 걸작을 낳았는지 명쾌하게 해설하고 있다. 그가 우리 시대 최고의 화가가 된 건 바로 이런 미술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insight) 때문이리라. 그는 우리에게 고전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게 해준다.
다만 이번 전시의 아쉬움은 입장료가 싸지 않고, 작품의 수나 양에서 한국 관객을 충분히 충족시키기에 부족한 것 같다는 점이다. 앞으로 전시의 질을 더 높이는 방안을 고민해주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호크니 전시연계 강연>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주제강연1] 과학자 정재승이 '데이비드 호크니, 뇌 과학으로 그의 작품을 읽다'
- 일시: 2019년 4월 10일(수) 오후 7시
[주제강연2] 시인 박준 '예술가가 보는 세계'
- 일시: 2019년 5월 7일(화) 오후 7시
[호크니에 대한 더 많은 정보] https://seulsong.tistory.com/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