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동서가 다르지 않고 한국의 경우는 특히 그랬다. 어렵게 싹이 튼 민주주의가 독재자들의 사나운 칼날에 잘리고 국민은 그때 마다 피를 흘려 지키고자 했다. 4ㆍ19혁명이 그랬고 반유신, 반5공투쟁이 그랬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극심해지면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의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선두에는 언제나 학생들이었다. 연세대생 이한열 군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학생운동의 선두에 섰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그리고 민주주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대 가는가 / 어딜 가는가/ 그대 등 뒤에 내리깔린 쇠사슬을/ 마저 손에 들고 어딜 가는가 / 이끌려 먼저 간 그대 뒤를 따라 / 사천만 형제가 함께 가야 하는가 / 아니다 / 억압의 사슬을 두 손으로 뿌리치고 / 짐승의 철퇴는 두 발로 차버리자 / 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 /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 그대 왜 갔는가 / 어딜 갔는가 / 그대 손목위에 드리워진 은빛 사슬을 / 마저 팔찌 끼고 어딜 갔는가.
87년 6월 9일 교내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20살. 경영학과 2학년) 군은 사고 전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참담한 현실에 대한 자기성찰과 다짐을 담은 위의 습작시를 남겼다.
이한열 군은 6월 9일 오후 5시 5분 경 교내시위 도중 정문 부근에서 전경이 30m 전방에서 쏜 직격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고 그 자리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던 학생들은 이군이 나뒹구는 모습을 보고 발길을 다시 돌려 3, 4명이 부축해 병원으로 옮겼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이군은 호흡장애를 일으키고 혈압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온몸의 신경이 마비된 상태에서 기나긴 혼수상태가 시작되었다. 20살의 짧은 생애를 '행동하는 양심자'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이군은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27일 간의 의식불명 상태 끝에 7월 5일 새벽 2시 5분경 끝내 숨짐으로써 6월민주항쟁에 꽃다운 젊음을 바친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이군의 사망 직후 세브란스병원측은 직접사인이 심폐기능 정지, 중간 선행사인은 폐렴, 최초 선행사인은 뇌손상이며, 뇌손상은 첫째 두개강 내 출혈, 둘째 뇌좌상, 셋째 두개강 내 이물질 함유라고 밝혔다.
이군이 숨진 7월 5일 세브란스병원 부검실에서 서울의대 이정빈 교수(법의학),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 등의 집도로 사체부검이 실시되었다. 첫 번째 부검에서 뇌 속에 든 이물질이 적출되지 않자 집도의들은 이군의 뇌실물질을 방사선과 X선실로 옮겨 X레이 촬영을 통해 뇌간에 박혀 있는 2~3mm 크기의 금속성 파편 2개를 찾아냈다.
최루탄 뇌관 구리물질이 이군의 뇌 속에 박혀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이 직격 최루탄을 쏘아 이군을 죽인 것으로 입증된 것이다.
이군의 사망 직후 경찰은 30개 중대 4,500여 명의 전경을 연세대 정문에서부터 동문ㆍ후문 등 병원 출입구는 물론 신촌로타리 일대까지 배치, 학생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들끓는 학생ㆍ시민들의 분노의 물결은 경찰의 봉쇄를 뚫고 이군의 영안실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경찰이 이군의 시신을 빼돌리는 것을 막기 위해 영안실 주변을 철저히 경계했다.
6월항쟁이 불붙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군의 사망은 타는 불길에 휘발유를 끼얹는 격이었다. 연세대생 2천여 명은 이날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추진결의대회'를 갖고 '민주국민장'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애국학생 고 이한열열사 민주국민장장례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함석헌ㆍ문익환ㆍ김영삼ㆍ김대중ㆍ강석주ㆍ윤공희ㆍ김은호ㆍ안세희 등이 고문에 위촉되었다.
학생들이 움직였다. 서대협, 부산지역총학생협의회, 호남지역학생연합건설준비위원회 등 전국 8개 학생단체는 공동성명을 발표, 6일부터 11일까지 6일간을 이한열 열사 추모기간으로 선포한다고 발표하고 행사를 주관했다.
이군의 영결식은 사후 5일이 지난 9일 아침 7시, 학생ㆍ시민ㆍ재야단체ㆍ정치인 등 7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세대 본관 앞에서 장중하게 거행되었다.
영결식의 마지막 무렵에 이군의 어머니 배은심 씨가 단상으로 올라와 "여기 모인 우리 젊은이들이여! 불쌍한 우리 한열이가 못다 이룬 민주화를 꼭 성취해주세요" 라고 울먹이면서 "우리 한열이는 이 세상에 없다. 살인마 물러가라. 살인마 물러가라. 한열아, 한열아" 라며 오열, 영결식장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영결식이 끝난 뒤 운구는 대형태극기와 이군의 대형초상화, 각계 각층에서 마련한 250여 개의 만장을 앞세우고 장례위원ㆍ학생ㆍ시민들의 추모행렬이 뒤따르는 가운데 연세대를 떠나 신촌 로타리에서 노제를 지내고 시청 광장으로 향했다. 운구행렬이 지나는 연도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독재타도'를 소리치면서 이군의 죽음을 애도했다.
시청광장에는 3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 '시민묵념'을 올렸으며 이어 시민다수가 시위대로 변해 광화문 쪽으로 향해 행진에 나섰다. 시위대는 오후 3시경 태평로를 점거, 밤 늦게까지 경찰과 대치했다.
한편 이군의 운구는 서울 양재동 톨게이트를 출발해 오후 5시 모교인 광주 진흥고에 도착했다. 30분간 노제를 지낸 뒤 YMCA 앞에서 추도식을 갖고 저녁 늦게 망월동 5ㆍ18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날 노제와 추도식, 망월동에는 수십 만명의 인파가 모여 민주투쟁에 앞장섰다가 꽃다운 나이에 숨져간 젊은 영혼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집계에 따르면 이날 이군의 추모집회에는 서울 1백만, 광주 50만, 부산 3만 명 등 전국에서 모두 160만 명이 추도식이나 행렬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