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세월이 가면' 중에서
지울 수 없는 건 사랑만이 아니다. 모든 강렬한 것은 남는다. 세월이 흐르면 잎은 떨어져 흙이 되지만, 사람의 일은 단순하지 않아서 아무리 지우려 애써도 과거의 그 자국만은 가슴에 남는다. 더욱이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라면 이는 평생의 상흔이 될 수밖에 없다.
세월호 5주기를 나흘 앞둔 지난 12일, 대한성공회 광주교회 청년회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를 초청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가족처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하고 싶다는 김영오씨의 뜻에 따라 이날 모임은 강연이 아닌, 유가족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야기와 다과를 나누는 간담회로 진행됐다.
"적폐는 바위, 나는 계란"
2014년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46일간 단식을 했던 김영오씨. '유민 아빠'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그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고.
김영오씨에게 박근혜 정부는 지옥과 같았다. 국가의 불법 사찰은 일상이었고, 지인과 가족에게 보낸 문자가 전송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언론과 보수단체가 퍼뜨린, 그에 대한 각종 가짜뉴스와 조롱이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느낀 절망감을 "적폐는 바위, 나는 계란"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그는 1년 전부터 광주에 정착해 살고 있다. 안산에서조차 세월호 추모공원이 혐오시설로 내몰리는 것을 보며, 그는 세월호 투쟁 당시 유가족을 가장 뜨겁게 반겨주었던 광주를 떠올렸고 마침내 광주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촛불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상처를 입고 이제는 사람이 무섭기까지 한 그이지만, 지금도 그가 가장 힘을 얻는 순간은 노란 리본을 마주했을 때라고 한다. 길가의 차량과 시민들의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보고, 여전히 세월호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시민들이 곁에 있음을 느끼며 고맙고 또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오씨의 근황 이외에도 세월호 참사의 원인, 진상 규명 운동의 현황, 앞으로의 전망 등 여러 주제를 두고 시민들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김영오씨는 촛불의 지속을 부탁했다. 고통 받는 약자의 슬픔에 공감하고 행동하는 촛불이 꺼지지 않고 이어질 때, 비로소 세월호 진상 규명이 완결되고, 그리고 세월호처럼 억울한 일이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편, 이날 간담회를 주최한 대한성공회 광주교회 청년회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규명되고,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더 의미 있는 기억으로 자리 잡는 그 날까지 함께 할 것"이며, 앞으로도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길 것"이라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유민 아빠' 김영오 씨는 성공회 광주교회에서 마련한 강연료를 극구 사양했습니다. 대신에 강연료 전액을 근로정신대 피해자 분들을 위해 교회의 이름으로 기부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