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아내와 함께 전남 신안군에 다녀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년을 맞아 목포와 신안군 하의도 일원에서 열리는 2019 김대중평화캠프 행사(6월 1일~2일) 전체회의가 신안군청에서 열린 것. 서울을 비롯해 부산, 인천, 대전, 포항, 고양, 안산, 부천, 광주 등 전국 11개 지역에서 22명이 참석, 숙소 및 승선 배정 등을 점검했다.
전북 군산에서 신안군 압해읍에 위치한 군(郡) 청사까지는 약 160km, 소요 시간은 1시간 50여 분. 거리도 군산-목포 구간과 비슷했다. 서해안고속도로 군산 나들목으로 진입, 김제-부안-고창-함평-무안을 지나 목포로 접어든다. 목포 나들목에서 우회전, 5분쯤 달리니 닐센아치교 형태의 압해대교(3,563m)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다리는 다도해(1004개 섬) 관문이기도 하다.
국내 기초단체 중 유일하게 '1004개 섬'으로 형성된 신안군
군산시와 신안군은 근해에서 해저 유물이 무더기로 발굴되고, 일제강점기(1920년대) 조선 농민들의 대규모 항쟁(소작쟁의)이 일어났던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리적, 역사적 인연도 존재한다. 군산시 옥도면(고군산군도) 일부가 한때(1896~1914) 전남 지도군(지도읍)에 속해 있었던 것. 그래서 그런지 방문할 때마다 이웃 동네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국내에 신안군처럼 넓은 면적을 보유한 시나 군은 없을 겁니다. 육지와 바다를 합하면 서울시 면적의 22배에 달하거든요. 신안군은 동부(압해읍, 자은면, 암태면, 팔금면, 안좌면), 흑산(흑산면), 남부(비금면, 도초면, 하의면, 신의면, 장산면), 북부(지도읍, 임자면, 증도면) 등 4개 권역으로 나뉩니다, 훗날 다시 오셔서 섬 투어하실 때 참고하면 좋을 듯합니다."
이재근 신안군청 학예연구사(아래 학예사)의 귀띔이다. 그에 따르면 신안군은 14개 읍·면(임자면, 지도읍, 증도면, 자은면, 압해읍, 암태면, 팔금면, 비금면, 안좌면, 도초면, 하의면, 장산면, 신의면, 흑산면 등)으로 이뤄졌다. 재미있는 것은 국내 시·군·구 기초단체 중 유일하게 1004개 섬(유인도 72개, 무인도 932개)으로 형성됐으며, 12개 면 단위 모두가 섬이라는 것이다.
"송공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일몰은 환상적"
이날 돌아본 섬과 명소는 해변과 일몰이 아름답다는 압해도, 자은도의 분계해수욕장, 암태도의 소작쟁의 기념탑, 안좌도의 천사의 다리(퍼플교), 수화 김환기 생가 등이었다. 가는 곳마다 주민들의 애환과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해송이 숲을 이루는 방풍림과 산줄기가 활모양으로 감싼 분계해수욕장은 자은도의 백미였다.
"압해도의 압해(押海)는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입니다. 섬 모양이 3개의 선풍기 날개 모양으로 바다를 누르고 있는 듯한 형상이어서 '압해도'라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섬의 주봉인 송공산(234m)에는 삼한 시대 이전에 축조된 석성(송공산성) 흔적이 남아있지요. 분재공원도 있고, 등산로(둘레길)도 나 있는데요, 정상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일몰은 환상적입니다."
이재근 학예사의 부연 설명이다. 신안군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섬과 섬,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교량도 많았다. 목포와 서해안고속도로로 통하는 압해대교(목포-압해)를 비롯해 천사대교(압해-암태), 중앙대교(암태-팔금), 김대중대교(압해-무안), 은암대교(자은-암태), 신안제1교(팔금-안좌) 등. 다리를 지날 때 좌우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감탄사를 터트리게 했다.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섬(3300여 개)의 1/3이 몰려 있고,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군(郡) 전체가 관광지라는 것. 자은도의 분계, 임자도의 대광, 암태도의 추포, 비금도의 명사십리, 도초도의 시목, 대흑산도의 진리 등 해수욕장도 곳곳에 널려있다. 따라서 어느 해안에서도 푸른 조각보에 수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섬무리를 조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년의 시차 두고 일어난 암태도와 군산 소작인 항쟁
돌도 많고 바위도 많다는 암태면, 그곳 장단고길(암태면 주민센터) 앞에 우뚝 솟아있는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巖泰島小作人抗爭記念塔)'은 발길을 한참 멈추게 했다. 기념탑 아래에는 악질 지주의 가혹한 착취에 앞장서 저항했던 지역 농민 43명의 이름과 소설 <암태도>를 쓴 송기숙 작가의 글이 음각되어 그날을 증언하고 있었다.
암태도 소작쟁의(1923~1924)는 동학농민혁명 이래 민족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낡은 제도와 외세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항쟁으로 거듭난 사건이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비호를 받아온 지주들이 소작료를 7~8할까지 올려 받자 소작인들 저항이 번져갔다. 이에 암태도 소작인들도 분연히 일어나 악질 지주와 맞서 싸웠다.
어느 지역보다 일찍 깨우친 암태도 소작인들은 면민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소작료 불납으로 버티면서 대항하였다. 끝내 양쪽이 크게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은 편파적으로 소작인들을 구속하였다. 분노가 폭발한 소작인 600~700명은 돛단배를 타고 목포로 나가 거리를 휩쓸고, 검찰청을 점거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오랫동안 맹렬히 싸와오든 암태 소작문제는 이 사이 일단락을 마쳤다는데 이제 그 내용을 듣건데 소작인 대표 박봉희(朴福永:박복영)씨와 광주 노동회 간부 서정희(徐廷禧)씨와 전남경찰부 고등과장(全南警察部 高等課長) 고하(古賀)씨와 목포(木浦) 경찰서장 등의 극력 조정으로 지주 문재철(文在喆)씨는 소작인회의 요구인 사할을 승낙하는 동시에 금 이천 원을 그 소작인회에 기부하기 되었더라." - 1924년 9월 2일치 <동아일보> 기사(현대어로 수정)
옛날신문에 나타나듯 암태도 소식이 연일 대서특필되자 전국의 조선인들이 땀을 쥐며 지켜봤고, 결국 지주들이 소작료를 4할로 내린다. 암태도 농민들이 대승을 거둔 것. 자그만 섬 소작인들의 저항은 해외에서 동정금을 보내오는 등 국내외 동포들의 관심과 격려로 일본인 지주들까지 굴복하게 만든다. 이는 소작인이 최초로 승리한 항쟁으로 소작쟁의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불씨가 됐다.
그로부터 3년 후(1927), 군산에서도 농민항쟁(옥구 이엽사농장 소작쟁의)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많은 농민이 구속됐다. 쟁의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남녀 80명이 경찰에 체포되고 그중 34명이 재판에 넘겨져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일본인 지주와 경찰에 조직적으로 대항했던 군산 지역 소작농들의 의식 또한 암태도 농민항쟁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