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소복 입고 고종의 승하를 슬퍼하며 / 대한문 앞 엎드려 통곡하던 이들
꽃반지 끼고 가야금 줄에 논다 해도 말할 이 없는 / 노래하는 꽃 스무 살 순이 아씨
읍내에 불꽃처럼 번진 만세의 물결 / 눈 감지 아니하고 앞장선 여인이여
춤추고 술 따르던 동료 기생 불러 모아 / 떨치고 일어난 기백
썩지 않은 돌 비석에 줄줄이 / 이름 석 자 새겨주는 이 없어도
수원 기생 서른세 명 / 만고에 자랑스러운 만세운동 앞장섰네.
- 이윤옥 '수원의 논개 33인의 꽃 김향화' 가운데 일부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인 김향화(金香花, 1897. 7. 16 ~ 모름) 지사를 알게 된 것은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때 기생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원 기생 33명이 만세 운동에 앞장섰음에도 그 사실조차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엄습했다. 김향화 지사라도 알리자고 시작한 것이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록하는 작업의 시작이었다.
어제(8일) 오후, 수원 기생 김향화 지사를 비롯한 '수원 여성의 독립운동'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수원박물관을 찾았다. 김경표 학예연구사와 미리 연락을 해둔 덕에 전시관을 비롯, 수원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수원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는 모두 4개의 방으로 꾸며져 있다. 각 방은 1) 일제 식민지배와 수원사람들의 항거 2) 수원 기생 만세운동의 주역 김향화 3) 구국의 선봉에 나선 학생 이선경 4) 수원여성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생 출신의 김향화(2009년 대통령표창) 지사와 구국국민단에서 활약한 수원의 잔 다르크 이선경(2012년 애국장) 지사는 별도의 방을 만들 정도로 그 활약이 눈부신 분들이다.
특히 기자가 10년 전 김향화 지사의 글을 쓸 무렵만 해도 참고 될만한 사진이라고는 <조선미인보감>(1918) 정도 밖에 없었는데 이번 수원박물관 전시에서는 김향화 지사와 관련된 희귀한 사진들이 공개돼 감회가 남달랐다.
그 가운데 특히 김향화 지사가 하얀 소복 차림의 동료 수원 기생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망곡례(望哭禮)하는 모습, 김향화 제적부, 만세운동을 불렀던 자혜병원 모습, 김향화의 지문을 찍은 신분장 지문원지(1919) 등의 사진 앞에서 오랫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마치 당시의 김향화 지사를 실제로 마주하는 것 같았다. 스무 살 나이의 기생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만세운동에, 그것도 단체로 동참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수원예기조합 출신의 33명은 그래서 더 그 이름이 고귀하다.
김향화, 서도흥, 이금희, 손산홍, 신정희, 오산호주, 손유색, 이추월, 김연옥, 김명월, 한연향, 정월색, 이산옥, 김명화, 소매홍, 박능파, 윤연화, 김앵무, 이일점홍, 홍죽엽, 김금홍, 정가패, 박화연, 박연심, 황채옥, 문롱월, 박금란, 오채경, 김향란, 임산월, 최진옥, 박도화, 김채희 (만세운동에 참여한 33인의 수원기생)
전시실 벽면 가득히 수원기생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있다. 하지만 수원 기생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독립유공자 서훈자는 김향화 지사 뿐이다.
한편, 기자가 수원의 잔 다르크라고 이름을 붙여 헌시(獻詩)를 쓴 적이 있는 제2전시방의 주인공 이선경(李善卿, 1902-1921) 지사는 19살에 순국의 길을 걸은 분이다.
경기도 수원면 산루리 406번지(현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서 태어나 삼일여학교를 졸업한 이선경 지사는 <구국민단>에서 구제부장(救濟部長)을 맡아 활동하다가 그만 일제 경찰에 발각됐다. 옥고를 치르던 중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살의 나이에 순국했다.
열아홉 값진 목숨 / 극악한 고문으로 / 쓸쓸히 떠났건만
오래도록 찾지 않아 / 무덤조차 잊힌 구십 성상
임이여! 조국의 무관심을 용서하소서 / 조국의 비정함을 용서하소서
– 이윤옥 '다시 살아난 수원의 잔 다르크 이선경' 시 가운데 일부
이선경 지사는 "한일병탄을 반대하고 조선독립을 계획할 것과 독립운동으로 감옥에 들어간 가족을 구제" 하기 위해 <구국민단>에 가입했다. 이 일로 이선경 지사는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투옥된 지 8개월만인 1921년 4월 12일 가출옥 됐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 때문에 집으로 옮겨진 지 9일 뒤 19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이선경 지사가 숨진 지 93년만에 정부는 이선경 지사의 독립운동을 인정했다. 2012년에야 서훈을 추서했는데, 너무 늦은 일이다.
제3전시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김경표 학예연구사의 설명은 길게 이어졌다.
"이 코너에 있는 사진은 차인재 지사 후손이 제공한 겁니다. 특히 1916년 8월 24일에 찍은 김몌례 선생 송별회 기념 사진 속에 나오는 수원삼일여학교동창회 사진은 전에 입수한 사진인데, 여기에 차인재 지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김경표 학예연구사가 말한 것은 앞줄에 학생들이 앉아있고, 뒷줄에 교사로 보이는 인물들이 십여 명 서 있는 흑백 사진이다. 대개 과거 사진의 경우 인물들의 이름을 적어 놓지 않아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차인재(1895-1971) 지사는 수원 삼일여학교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나와 이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이른바 사진 신부로 미국으로 건너가 임치호(1879-1951) 지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부부독립운동가이다.
이들 부부는 미국에서 힘겹게 수퍼마켓 등을 경영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차인재 지사는 대한여자애국단, 임치호 지사는 대한인국민회 등에 가입하여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기자가 차인재 지사의 외손녀를 만난 것은 지난 2018년 8월이다. 미국 LA 헌팅턴비치에 자리한 윤패트리셔씨(71) 집에 찾아가서 차인재, 임치호 지사의 독립운동 이야기와 당시의 귀중한 사진을 많이 받아 왔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이번 전시회에 전시돼 있어 기뻤다(관련 기사 :
"할머니는 초인적으로 일해 모은 돈, 조국 독립 위해 쓰셨다").
차인재·임치호 지사에 관해 취재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올린 뒤 수원박물관의 김경표 학예연구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올 초의 일이다. 3.1만세운동 100돌을 맞이하여 '수원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전시 기획 중인데 수원삼일여학교 출신인 차인재 지사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연락이 닿아 추가 자료를 전달 받았고, 이번 전시회를 하게 된 것이다. 기쁘기 짝이 없었다.
특별히 이번에 사진 자료 등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018년 8월 차인재 지사 후손 집을 함께 찾아갔던 <우리문화신문>의 양인선 기자가 올 초 다시 LA를 방문하게 되어 직접 외손녀인 윤패트리셔 집을 재차 방문한 덕이 컸다. 양 기자는 수원박물관의 기획 전시를 설명하고 자료 협조를 구했다. 양 기자와 통역을 맡아준 따님 이지영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차인재 지사 외에도 제3전시방에는 수원의 독립운동가 임면수(1874-1930) 지사와 함께 부부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전현석(1871-1932) , 나혜석(1896-1948), 한국 최초의 의생(의사)면허를 따서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이그레이스(1882-모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문봉식(1913-1950)과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한 최경창(1918- 모름), 홍종례(1919- 모름) 지사 등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이 상세히 전시돼 있다.
이 가운데 김향화(2009년. 대통령표창), 이선경(2012. 애국장), 차인재(2018년. 애족장), 최문순(2018년. 대통령 표창), 문봉식(2019년. 대통령 표창) 지사만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고 나머지는 아직 서훈자 이름에도 올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올초 차인재 지사의 후손이 사는 LA 집을 재차 방문하여 이번 전시에 많은 자료를 제공한 양인선 기자는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수원에 이렇게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계신줄 몰랐다. 특히 삼일여학교 출신의 차인재 지사와 관련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어 기쁘다. 차인재, 임치호 지사의 외손녀인 윤패트리셔 씨도 할머니 차인재 지사의 자료가 수원박물관에 전시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 전시된 내용과 책자 등을 수원박물관에서 미국으로 보내주면 좋겠다."
이날 전시장을 찾은 기자에게 오랫동안 시간을 내서 수원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해준 김경표 학예연구사의 열정을 보면서 '수원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더욱 돋보였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과 동시대를 살지 못한 우리들이 그분들의 업적과 독립정신을 기릴 수 있는 건 공개된 '전시'와 '자료'를 통해서다. 기생 출신의 김향화 지사의 경우도 수원박물관에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해서 서훈을 받은 것을 보면, 관련 기관의 역할이 중대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번에 수원박물관에서 진행되는 '수원 여성의 독립운동' 전시는 3월 29일(금)부터 6월 9일(일)까지 이어진다. 전시 기간이 넉넉한 만큼, 시간을 내어 가족과 함께 방문해 보는 것도 의미 깊을 것이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테마전 "수원 여성의 독립운동" 전시 안내>
*수원박물관 :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청룡대로 265(이의동)
*휴관일(4월1일, 5월 7일, 6월 3일)
*문의: 031-228-4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