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기 시작하니 그것을 본 다른 아이가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거짓말 아냐? 엄창 찍어봐."
엄창?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대부분의 아이들 눈은 휘둥그레졌고, 그 뜻을 몰라서 서로 그 의미를 묻느라 바빴다.
"엄창이 뭐야?"
"몰라. 너는 알아?"
"그것도 몰라? 엄마 창녀의 줄임말. 네 말이 거짓말이라면 너네 엄마 창녀라는 뜻이지."
아이는 자신이 대단한 것을 알려준 것처럼 으스댔지만,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아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처음 들었지만 '엄창'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흉측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과거 기억 다시 떠올리게 만든 나경원 원내대표
그런 '엄창'을 최근 다시 소환해낸 이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제1야당 원내대표 나경원 의원이다.
나 원내대표는 지난 11일 대구에서 열린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한국당의 베이스캠프 대구시민 여러분 사랑한다"며 2부 첫 연사로 무대에 올라 연설을 하던 중 문제의 단어를 사용했다.
"좌파·독재라 그러면 '촛불 정부인데 왜 그러냐'고 화낸다. 이거 독재 아니냐....(대통령 특별대담 질문자로 나선) KBS 기자가 물어봤는데 그 기자가 요새 문빠, 달창 이런 사람들한테 공격당하는 거 알지 않느냐. 묻지도 못하는 게 바로 독재 아니냐."
어처구니없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달창'이라니. 그것은 곧 내가 초등학생 시절 들어왔던 '엄창'의 정치적 버전이요, 성인용 버전 아니던가. 30년 전 초등학생 어린이들도 차마 역겹고 불경스러워 자체적으로 폐기한 단어를 어찌 2019년의 제1야당 원내대표가 쓸 수 있단 말인가.
'창녀'라는 단어는 미투운동이 벌어지고 여성의 인권 신장에 대해 특히 민감한 이 시대에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다. 창녀는 아주 오랫동안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할 때 비하적인 의미로 사용돼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여성인 나 원내대표가 창녀가 들어가 있는 단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쓰다니 더 황당할 수밖에. 아무리 정치적으로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여성 정치인이 그렇게 쉽게 여성혐오적인 단어를 쓸 수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에 대해 나 원내대표는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3시간 30분 뒤 바로 사과의 뜻을 밝히며 입장문을 냈다. "정확한 의미와 표현의 구체적 유래를 전혀 모르고 특정 단어를 썼다. 결코 세부적인 그 뜻을 의미하는 의도로 쓴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역시 한심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설령 진짜 뜻을 몰랐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결국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정치인이 그 의미도 모른 채 발언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극우사이트를 인용하는 자유한국당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나 원내대표는 입장문에서 "인터넷상 표현을 무심코 사용해 논란을 일으킨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했는데, 그것이 그의 인식이라면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극우사이트 일베에서 쓰는 용어를 '인터넷상의 표현'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그냥 인터넷과 극우사이트는 엄연하게 다르다. 일베는 지금까지 5.18, 노무현, 세월호 등 사회적 사안에 관련해 수많은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여론을 호도해 왔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 하나의 범죄이며,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그릇된 가치관이다. 그런데 이런 극우사이트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제1야당 원내대표가 아무 비판 없이 인용하고 있으니 비극일 수밖에.
자유한국당은 그들이 정권을 잡았던 지난 10년 동안 당시 야당을 비롯한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극우사이트를 이용해왔고, 이는 언론보도나 박근혜 사법농단 재판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책임 있는 제 1야당이라면 과거의 악습을 반복해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