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법은 엉터리다.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이 만든 유신헌법을 두고 했다는 말이다. 남덕우 당시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이 자신의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 서서>에서 밝힌 대목이다.
박정희 자신도 '엉터리'라고 표현한 유신헌법은 1140여 명의 긴급조치 위반 피해자들을 양산했다. 긴급조치는 당시 유신헌법에 규정된 특별조치로 박정희 정권과 유신헌법을 비판, 반대하거나 이를 언론보도 등으로 알릴 경우 영장 없이도 체포, 구금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무효라고 판결했고, 2013년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은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한 의혹을 받고 있는 '양승태 대법원'은 2014년과 2015년 각각 '당시 유효한 법규였던 만큼 공무원의 직무행위가 곧바로 불법행위가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긴급조치 발령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없다'며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초선, 은평갑) 주최로 열린 '긴급조치 피해자 원상회복 방안 토론회'는 이에 대한 해법을 논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양승태 대법원의 논리는 식민지배 부역자 단죄 못한 논리와 같다"
발표자였던 송병춘 변호사도 긴급조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75년 박정희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를 규탄한 첫 대규모 학생시위인 '오둘둘(5.22) 사건'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남산 대공분실에 끌려가 2박 3일간 무자비한 폭력을 당했다.
송 변호사는 44년 전 자신을 영장 없이 구속한 검사의 이름부터 긴급조치를 적용한 1심 판결을 내린 판사의 이름까지 모두 기억했다. 특히 자신의 피해 사례를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의 사법부와 양승태 사법부를 동시에 비판했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1심 재판을 거부했다. 재판장이 채영묵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굉장히 분노하며 징역 4년을 때렸다. 난 주범도 아니고 종범 정도였는데(웃음). 항소심에서 2년으로 깎였다. 2년 만기 다 채워 나와서 한 달 만에 영장이 나오더라."
"(양승태) 대법원에서 (국가 배상을) 기각했다. 긴급조치가 위헌이긴 하지만 긴급조치를 운용한 수사기관, 재판기관의 불법 행위성은 인정 못한다는 거다. 마치 식민지배는 민족 말살 행위라면서도 식민지배에 부역한 자들은 단죄하지 못한 것과 같다."
이미 위헌 결정을 받은 긴급조치에 '국가배상 책임이 없다'며 역행한 양승태 대법원에 대한 분노였다. 피해자들의 비판에서 현 정부도 자유롭지 못했다. 하급심 재판에서 대법원 판결을 뒤집는 판결이 나왔음에도, 법무부가 항소를 제기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송 변호사는 "조폭집단처럼 체제에 부역해 온 법원은 수사와 재판의 불법성에 대한 사죄를 공식 판결문에 남겨야 한다"라면서 "일부 법원 판사 중엔 선배들의 행위에 사죄한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지나간 이야기에 불과하다, 관료조직 뒤에 숨어 쥐새끼처럼 범죄행위를 한 대법원이 독립된 법관으로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현 법무부를 향한 비판도 제기됐다. 발제자로 참여한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법무부가 (배상 판결에) 항소를 하고 있다, 박상기 법무부장관이 한 것이다, 이게 촛불정부인가 싶어 분노했다"라고 말했다.
이탄희 "긴급조치 사법거래, 우연이 아니다"
사법농단 의혹을 처음 세상에 알린 이탄희 전 판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양승태 대법원'이 긴급조치와 같은 국가 폭력 피해를 거래 대상으로 삼은 본질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패널로 참가한 이 변호사는 "사법부라는 조직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판결도 조직을 위한 판결을 할 수밖에 없다"라면서 "힘 있는 사람의 편에 서면 (사법부가) 원하는 법안도 통과시켜주고 예산도 주며 파견 자리도 준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법원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국가 폭력 피해가) 거래대상으로 전락하는 거다, 절대 우연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판사 이름을 정치인, 연예인 이름 외우듯 외우고 그랬으면 좋겠다. 마음에 드는 판결을 한 판사, 이상한 판결을 한 판사... (중략) 내가 관료라는 생각을 하는 판사와 그렇지 않은 판사, 그 기준에서 판사 이름을 외워야 한다. (그 중) 누가 헌법재판관이 되고 대법관이 되는가. 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법부가 조직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양승태 대법원의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이 변호사는 "대법원에서 (조직보다 사법정의에 집중하는) 대법관이 포함되면, 판례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다"면서 개별 법관에 대한 투명한 정보와 관심을 촉구했다.
'판결 뒤집기'에 소극적인 사법부의 한계는 '독립 합의제 구제 기구'로 극복할 수 있다고 봤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초선, 서울 은평갑)이 대표 발의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기간 중의 사법농단 의혹 사건 피해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안'과 궤를 같이 하는 주장이었다. 이 변호사는 "독립 구제 기구를 설치해 제3의 방안을 만들어 이를 수용하는 방식이 (사법부의) 저항이 덜해 현실화하기 쉽다"라고 말했다.
입법 해결보다 중요한 건 "사법불법 청산"
"택시에서 '대의원 선거는 꼭두각시놀음이다, 헌법을 고쳐 유신헌법을 조작해 만든 것'이라고 말함" - 유언비어 날조 유포, 사실왜곡 전파로 징역, 자격 정지 1년 6개월
"용산발 목포행 열차에서 술에 취해 '동무, 우리의 인민' 등 북한의 상투적 용어를 사용하며 '유정회는 국회의원도 아니고 잡동회다, 대통령 선거가 대의원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부당하다'고 고성으로 외침" - 사실왜곡 전파로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
토론회 패널로 참가한 권혜령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정리위 조사관은 이 자리에서 긴급조치가 위헌의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전수 조사를 통해 입증한 과거 사례로 설명했다.
특히 긴급조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처벌 사례 중 '음주 대화 중 또는 수업 중'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거나 유신 체제 비판 발언을 한 경우가 약 48%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조사 전엔 반정부 시위의 피해사례가 가장 많을 것으로 짐작했지만 실제와 달랐다"라면서 "박정희 정권은 일상적으로 국민 생활을 감시하고 처벌했다"라고 설명했다.
"가해자 측인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을 조사한 적이 있다. 이 분이 한 말이 뭐냐. 자기 행위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것 뿐이라는 거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을 기소하지 않은 검사와 판사의 불법성이 크다는 주장이었다."
"사건을 거래 대상으로 전락시켜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으로 관철하려 한 정치판사가 수십 명이다. 명단도 발표하지 못하게 한다. 여전히 일부는 재판을 수행하고 있다."
권 조사관은 또한 이 자리에서 과거의 국가폭력 가해자와 현재의 사법농단 가해자를 동시에 언급했다. 권 조사관은 "현재 정치적으로도 (피해 해결을 위한) 입법 통과가 어렵다"라면서 "지금이라도 사법부가 과거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사법 불법을 청산하는 것이 일말의 방법이다"라고 강조했다.